9·11테러 현장에서는 유족에게 은총 기원…종교 지도자에게는 "원한 버려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누구에게나 인자하지는 않았다.

가난한 사람과 이민자, 노숙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끝없는 사랑으로 다가갔지만,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글로벌 지도자들에게는 거침없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전날 뉴욕에 온 교황의 25일(현지시간) 일정은 유엔본부 방문으로 시작됐다.

유엔은 회원이 아닌 교황청의 깃발을 유엔본부 정면 게양대에 다는 것으로 교황을 맞았다.

처음으로 유엔본부를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소와 다름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으며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유순택 여사, 그리고 '뽑기'에서 당첨된 400여 명의 유엔 직원들은 "교황"을 연호하며 반겼다.

유엔본부에 도착한 이후 총회장에서 연설이 시작되기 이전의 1시간 30분 동안은 '잔치' 분위기였다.

교황은 유엔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전기 카트를 타고 유엔총회장으로 이동할 때에도 '권위를 벗어던진' 교황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혹시라도 있을 '공격'을 막으려고 이스트 강(East River) 쪽 창문을 가린 커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총회장에서의 교황은 달라졌다.

50여 분간 이어진 연설은 글로벌 지도자에 대한 꾸중이었다.

자신의 연설을 들으려고 온 정상을 포함한 각국 대표를 신랄하게 꾸짖었다.

우선 교황은 강대국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누구도 환경을 파괴할 권리가 없는데도, 강대국들이 이기적이고 돈을 무한정 추구하면서 지구가 앓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파키스탄의 10대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은 박수로 반겼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금융기구는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국제 금융기구들은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을 돌봐야 한다. 각 국가가 강압적인 대출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말로 국제 금융기구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실태를 꼬집었다.

유엔의 5대 기구 중 하나인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권한을 남용하는 것도 문제로 꼽았다.

국제 사회가 시급하게 추진해야 할 일이 생기더라도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만 반대해도 추진하기 어려운 안보리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유엔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공감했다.

빌 게이츠는 교육 등에서 소외된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 재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하고 있다.

각국 지도자들 앞에서 날을 세웠던 교황은 9·11테러 현장에서는 희생자와 유족에게 은총을 기원했다.

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종교단체 대표 400여 명에게는 언어, 문화,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 서로 미워하는 마음과 복수심을 버려달라고 간청했다.

유엔본부와 9·11테러 현장에서 나온 교황의 발언 내용은 달랐지만 교황이 던진 메시지는 같았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국제사회가 되자는 것이었다.

(유엔본부연합뉴스) 박성제 특파원 sungj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