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윤기 선생, 권위 따윈 없었던 '술꾼 형님'…번역 일깨워준 은인"
“이윤기 선생님에게선 ‘그리스·로마신화 베스트셀러 작가’란 타이틀이 주는 권위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누구에게든 똑같이 밝고 편안하게 대했어요. 물론 그 곁엔 언제나 술이 있었고요. 다들 ‘주당(酒黨) 형님’이라 불렀죠.”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사 휴먼앤북스 대표인 하응백 씨(사진)는 최근 서울 경운동 사무실에서 오는 27일 별세 5주기를 맞는 작가이자 신화학자, 번역가 이윤기 씨에 대해 이같이 회상했다. 휴먼앤북스는 지난 1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번역본 총 10권을 완역 발간했다. 1917년 간행된 베르나도트 페린의 그리스어·영어 병기 판본을 원전으로 삼았다. 이 책은 이씨가 생전에 기획하고, 그의 딸 다희씨(35)가 6년간 번역에 매달려 출판계의 주목을 받았다.

작가 겸 번역가인 고 이윤기 씨(오른쪽)가 생전에 딸 다희씨와 함께 있던 모습.
작가 겸 번역가인 고 이윤기 씨(오른쪽)가 생전에 딸 다희씨와 함께 있던 모습.
화제의 뒤편엔 하 대표와 이씨의 깊은 인연이 숨어 있다. 두 사람은 1984년 처음 만났다. 당시 문단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가였던 이씨와 초보 평론가였던 하 대표는 1988년 별세한 박정만 시인의 시비(詩碑) 건립을 준비하다 본격적으로 친분을 맺었다. “이 선생님 주변엔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았어요. 재치가 넘쳤고, 흥이 나면 어디서든 걸쭉한 목소리로 노래 실력을 뽐냈죠. 하지만 문장을 빚어내는 실력만큼은 대단했어요. 번역가가 되신 이유도 교정을 보다 너무 열 받아서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다’ 하면서 시작하신 거예요. 자신만의 문체를 지닌 번역 천재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이씨는 번역 및 그리스·로마신화로 평단과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게 됐다. 2002년 휴먼앤북스를 세운 하 대표는 이씨에게 원고를 부탁하러 갔다. 이씨는 “서로 손바닥에 무슨 작품을 원하는지 써 보자”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동시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라고 썼다. 이씨는 이 작품을 딸 다희씨와 공동 작업했다. 딸이 번역을, 그가 감수를 맡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2010년 8월 이씨가 갑자기 별세하면서 번역은 오로지 딸의 몫으로 남았다. “다희씨가 중간에 번역을 포기하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이건 부녀지간의 약속을 떠나 국내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업이니 꼭 해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부담감이 엄청났을 텐데 정말 잘 이겨냈습니다.”

하 대표는 “이 선생님은 유명한 ‘딸 바보’였다”며 “어릴 때부터 딸을 번역가로 키워내기 위해 애를 썼다”고 전했다. 다희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전공을 수료한 재원이 됐다.

그는 “고전 완역본은 통념과 달리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팔리는 효자 상품”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원전이 주는 특유의 아우라를 발췌본이나 중역본은 따라잡지 못한다”며 “이 선생님은 내게 그런 번역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은인”이라고 덧붙였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