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섣부른 대학평가의 어두운 그림자
대학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은 1000년이 넘는 오래전 일이지만, 캠퍼스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대중사회에 들어온 것은 제2차 산업혁명이 있던 19세기 후반이다.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공과대(MIT)가 1861년 설립됐고, 일본의 도쿄제국대는 1877년 문을 열었다. 고려대와 연세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도 각각 1905년과 1915년에 개교했지만, 이 땅에 본격적으로 대학이 자리 잡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으로 현재 한국에는 모두 400개 가까운 대학이 있다.

그러면 전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대학이 있을까. 대학이 많은 나라를 순서대로 꼽으면 미국 3500여개, 중국 2500여개, 인도와 브라질이 각각 1600여개, 러시아 1500여개, 일본이 1000여개로 이들 여섯 나라의 대학만도 1만개가 훌쩍 넘는다. 이들을 포함해 180여개 국가에서 운영되고 있는 대학은 2만5000개 정도로 알려져 있다. 세계는 좁아졌고 대학은 이렇게 많아졌으니 대학 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몇몇 언론사 및 기관들의 비즈니스 마인드가 가세해 이제는 대학을 평가하고 그 순위를 발표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최근에는 스페인에서 한국의 학술원에 해당하는 국립기관이 세계 대학들을 평가해 1등 하버드대에서부터 무려 1만2000등까지 서열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학을 줄 세우는 일이 많아진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오히려 경쟁력 있는 대학일수록 확실하게 서열을 밝혀서 스스로가 정상급에 들어 있음을 알리고 싶어 하는 이유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평가 없이는 발전도 없다는 이야기도 있듯이 이런 대학 평가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지만 이제는 그 그림자도 짙어지는 듯싶다.

우수한 학생들이 찾아와 스스로의 미래를 가꾸기를 원하는 대학, 탁월한 능력의 교수들이 연구하고 가르치길 원하는 대학이 경쟁력 있는 대학이란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몇 개의 평가지표를 이용해 점수를 매기고 그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것은 전혀 합당한 일이 아니다. 대학 평가에서 중요한 지표는 정량화가 가능한 대학의 연구 성과이며 교육은 아니다. 연구는 그 성과에서 우열이 드러나지만, 교육은 학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우선이다. 그러기에 대학 평가가 그나마 의미를 갖는다면 이는 소위 연구중심대학에 국한되는 일일 것이다.

연구중심대학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에 큰 관심을 갖는 대학으로, 이는 결국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이 크게 활성화된 대학이다. 미국의 경우 이런 범주에 들어가는 대학은 겨우 100여개로 전체 3500여개 대학의 3% 정도뿐이며, 이를 제외한 3400여개 대학은 구태여 이야기하자면 교육중심대학인데 이들은 학부교육에 치중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사실 대학의 역할이 교육인데 그런 측면에서 교육중심대학이란 ‘축구중심축구장’이란 단어만큼 의미가 중첩된 잘못된 말이다. 연구중심대학에서의 연구도 결국은 미래의 연구자를 길러내는 교육활동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대학의 존재 가치는 교육에 있다.

여하튼 대학을 평가해 순위를 매기는 일은 싫든 좋든 이미 대세가 된 듯한데, 앞으로는 그 대상을 소수의 연구중심대학에만 국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열정을 갖고 학부교육에 임하는 대학을 줄 세워서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켜서는 안 된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함께 고민하는 교수가 많은 대학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대학이다. 또 한 가지는 연구중심대학의 평가에서도 모든 학문분야를 뭉뚱그려서 A대학이 1위, B대학이 2위 하는 식의 평가는 지양해야 한다. 그보다는 분야를 세분화해서, 예를 들어 물리학은 A대학이 1위지만 경제학은 3위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어차피 한 대학이 모든 분야를 다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데, 분야별 순위 발표는 그런 측면에서도 각 대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김도연 < 서울대 초빙교수·공학 dykim@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