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국내 기관투자가 "찬성도 반대도 애매"

미국의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삼성그룹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시름도 덩달아 깊어지고 있다.

외국계 주주를 중심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비율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고조되는 상황이지만 국내 기관투자가 입장에선 의사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합병 반대에 나섰다가 헤지펀드의 편을 들어줬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합병 가격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시장 전반에 확산할 경우엔 합병 찬성에 나선 기관투자가는 펀드 투자자들의 항의를 받을 수 있다.

삼성물산 주주인 A자산운용사는 10일 "합병에 반대하기도, 찬성하기도 애매하다"며 난처함을 드러냈다.

한 관계자는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 불리하다는 점에서 합병 반대 입장을 보이면 헤지펀드를 도와줬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다"며 "더구나 삼성물산 주가가 많이 오르면 합병에 반대하고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기가 힘들다"고 전했다.

B자산운용사는 아예 개별 종목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며 말을 아꼈다.

C운용사도 의사 결정을 할 때마다 주주총회 안건 분석이나 지배구조 연구기관의 의견을 따르지만, 이번 건은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국내 1위의 삼성그룹이 지배구조와 승계작업에 차질이 생기면 기관투자가도 주가 하락에 따른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의사 결정을 주저하게 하는 이유로 꼽힌다.

운용사의 한 관계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법인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그룹 내에서 정점을 차지하면서 가치 상승이 기대된다"면서도 "지배구조 개편 등의 작업이 순조롭지 못하면 시장 전반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진단했다.

국민연금도 비슷한 이유에서 의사 결정 방향을 저울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주주총회 안건 분석 자문기관인 서스틴베스트는 이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안은 삼성물산의 일반주주 지분가치를 훼손한다"며 삼성물산 합병안에 반대하라고 권고하는 의견서를 8개 자산운용사에 보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도 국민연금의 분석 의뢰를 받아 합병비율이 적합하게 산정됐는지 등을 살펴 다음 달 초까지 의견서를 보낼 예정이어서 어떤 결론이 나올지 시선이 쏠린다.

일부 외국계 기관투자가는 그러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에 대한 의사결정의 잣대는 주주이익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한다.

박유경 네덜란드연기금자산운용사(APG) 아시아지배구조 담당이사는 "합병비율이나 가격 문제는 세계 증시에서 흔히 거론되는 사안"이라며 "심플(단순)하게 주주총회에 참석해 반대 의견을 내면 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주주들과 대립 구도로 가는 것은 다른 나라의 메이저(주요) 기업과는 다른 모습"이라며 "장기 주주(투자자) 입장에선 오히려 삼성과 주주 간 갈등이 이미지와 기업 가치 및 정신을 훼손할까 봐 우려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윤선희 기자 indig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