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관료 체질'로 변하는 국민연금 운용역
“365일 중 적어도 100일은 각종 감사를 받는 데 매달려야 했습니다. 자금 운용에 신경을 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핵심 투자 업무를 맡았던 운용역이 최근 회사를 그만둔 뒤 기자에게 한 하소연이다. 국민연금은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감사원 국회 등 여러 기관의 관리 감독을 받는다. 2000만여명의 국민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기관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중복 감사’가 본업을 위협하는 구조라면 곤란하다. 기금의 최고 의사결정기구(기금운용위원회)에서 “행정 업무가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여기에 국민연금공단이 기금운용본부에 요구하는 각종 서류 행정도 많다.

더 큰 문제는 ‘연금 내부에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는 관료적 행태’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교한 투자 판단과 훈련된 직관을 통해 향후 수익이 날 것으로 확신하는 투자 대상이 있더라도 실제로는 투자를 하지 않는 건들이 많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소지가 있거나 국내에서 생소한 투자 대상이면 자체 검증 시스템에서 걸러진다는 얘기다. 지난해 국회에서 불거진 일본 전범(戰犯) 기업들에 대한 투자 논란을 지켜본 한 운용역은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속도로 오르던 일본 증시에 투자한 것이 문제가 될 줄 몰랐다”고 털어놨다.

논란을 피할 수 있는 투자만 하려는 분위기에선 수익률을 높이기도 어렵다는 것이 투자 전문가들의 얘기다. 투자은행(IB)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과 한국투자공사(KIC)가 동시에 경력직을 모집하면 10명 중 9명은 KIC를 선택한다”고 전했다.

기금운용체계 개편 논의가 복지부 주도로 다시 추진되고 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개편안을 내놓은 지 12년 만이다. 복지부가 10년 이상 헛돌고 있는 개편 논의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다면 몇 년째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국민연금 수익률을 반전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국민연금 자산운용역들의 얘기다. 이들이 관료적 타성에서 벗어나 본업에 충실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기금운용체계 개편이 논의돼야 한다고 국민연금 관계자들은 말한다.

좌동욱 증권부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