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정치 리포트] 낮은 행보로 '대세론' 굳히는 힐러리…공화당 잠룡들 '견제구'
미국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선거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최근 공식 출마를 선언하면서 내년 11월까지 19개월간의 대권 레이스가 본격 시작됐다. 힐러리는 지난주 첫 유세지로 아이오와주를 방문한 데 이어 20일(현지시간) 뉴햄프셔주를 찾는다. 뉴햄프셔는 아이오와와 함께 50개 주 가운데 가장 먼저 당내 예비선거(내년 1월)가 치러져 대선 초반의 판세를 결정하는 지역이라 ‘대선 풍향계’로 통한다. 힐러리 방문 이틀 전인 18일 뉴햄프셔 공화당원들은 시민들에게 차량 뒷범퍼에 붙이는 ‘스톱 힐러리(Stop Hillary)’ 스티커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공화당 대권 잠룡 10여명은 때마침 이날 뉴햄프셔 공화당지부가 개최한 ‘리더십 서밋’에 참석해 ‘힐러리 때리기’에 나섰다.

민주당, 힐러리 대세론 굳어가

뉴햄프셔주에 모여든 공화당 대권후보들은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힐러리를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 ‘힐러리는 20년 동안 직접 차를 운전해본 적이 없다’ ‘힐러리 캠프의 모금 목표는 25억달러인데 치폴레(힐러리가 아이오와주에서 방문했던 멕시칸 패스트푸드점)에서 엄청난 양의 멕시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금액이다’ ‘힐러리가 여행할 때는 짐을 싣는 비행기가 별도로 필요하다’ 등과 같은 그의 귀족 이미지를 비꼬는 발언부터 국무장관 재직 시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무차별 공세를 퍼부었다. 뉴욕타임스(NYT)는 19명에 이르는 공화당 예비주자 대부분이 “내가 힐러리의 대항마가 될 수 있다”고 호소하면서 힐러리를 흠집 내는 데 주력했다고 전했다.

공화당 ‘잠룡’들이 일제히 힐러리 때리기에 나서고 있는 것은 민주당과 진보진영에서 ‘힐러리 대세론’이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전문지 리얼 클리어 폴리틱스가 지난 2월26일부터 3월31일까지 6개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한 결과 힐러리의 민주당 내 평균 지지율은 59.8%였다. 힐러리의 대항마로 꼽혔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은 최근 불출마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틴 오말리 전 메릴랜드 주지사와 짐 웹 전 상원의원(버지니아)이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지만 힐러리 바람은 잠재우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다.

공화당 잠룡들, 일제히 ‘힐러리 때리기’

힐러리는 1993년 퍼스트레이디에서 시작해 상원의원,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국무장관에 이르기까지 거의 사반세기 동안 미 정치권의 주목을 받아왔다. 민주당 내에선 ‘그 누구도 세울 수 없는 기차(an unstoppable train)’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힐러리가 미국의 사상 첫 여성 대통령, 2차 세계대전 후 민주당이 12년 연속 집권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높은 대중적 인기가 어느 순간 ‘피로감’이나 식상함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60%를 웃돌던 힐러리의 지지율은 올 들어 50%대로 낮아졌고 대선 판도를 결정하는 ‘스윙스테이트(경합주)’에서는 50% 아래로 떨어졌다. 국무장관 재직시절 개인 이메일 계정만 사용해 투명성 논란이 불거진 후 CNN이 이달 초 플로리다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힐러리 지지율을 조사한 결과 한 달 전 53%와 55%에서 각각 49%와 48%로 떨어졌다.

공화당은 ‘이메일 스캔들’과 외교관 4명의 목숨을 앗아간 리비아 벵가지의 미 영사관 피격 사태에 대한 책임 문제, 1회 20만~30만달러의 고액 강연료 수취, 클린턴재단의 외국 정부 기부금 논란 등까지 도마 위에 올리고 있다.

공화당에선 현재 마코 루비오(플로리다), 테드 크루즈(텍사스), 랜드 폴(켄터키) 등 3명의 상원의원이 출마를 선언했다. 출마가 확실시되는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조지 W 부시 대통령 동생)와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 그리고 루비오 상원의원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 젭 부시가 힐러리의 대항마로 결정돼 24년 만에 클린턴과 부시 가문의 재대결이 이뤄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 워싱턴 정가의 관측이다.

표심 겨냥 ‘포퓰리즘’ 논란

힐러리 캠프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낮은 자세(low key)’ 행보다. 2008년 대선 때의 화려하고 웅장한 출정식 대신에 이번에는 2분19초짜리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 절제된 출사표를 던졌다. 첫 유세지인 아이오와주까지 1600㎞를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밴을 타고 이동하면서 중간중간 주유소에서 기름도 넣고 치폴레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도 연출했다.

두 번째 전략은 ‘좌 클릭’이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힐러리는 20년 이상 대중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의 경제철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며 “출마 선언 후 발언을 보면 포퓰리스트적인 성향이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힐러리는 출마선언 동영상에서 “사회 구조는 여전히 최상위층에만 유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트럭 운전기사들이 헤지펀드 임원보다 높은 세율을 적용받고, 기업 최고경영자의 연봉이 일반 근로자의 300배가 넘는다”며 “무언가 잘못돼 있다”고 했다. 부자 증세를 비롯한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정책 기조와 맥을 같이한다. 전문가들은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복지 확대 등 표심을 겨냥한 포퓰리즘 정책이 더욱 노골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힐러리는 또 지난 17일 대형 금융회사 규제법안(도드-프랭크법안)을 주도해 ‘월가 저격수’로 불리는 게리 켄슬러 전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장을 캠프 재무담당최고책임자(CFO)로 영입하기로 해 월가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친(親)월가 성향이라는 공화당의 비판을 차단하려는 포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