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어느 마당발의 죽음
그는 또박또박 옛 동지들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그 옆에 1억 혹은 2억 등의 숫자도 써넣었다. 숫자가 없는 사람도 있다. 해석이 분분하다. 우리의 주인공은 1000명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수십년간 거르지 않고 조찬모임을 다녔던 사람이다. 대한민국은 조찬모임의 나라이기도 하다. 아침을 두 탕 뛰는 사람도 있다. 미국에서라면 정신질환 진단을 받을 것이다. 네트워크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 지식이나 공부와도 별 상관이 없다. 아니 모임 자체가 지식의 부재를 보여준다. 지연 혈연 학연에 목말라하는 그들에게 조찬모임은 대용품이다.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수첩에 이름이 없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마당발이다. 그에게 적과 동지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누구에게라도 미소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온갖 민원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어렵사리 그 칭호를 얻을 수 있다. 초등 4학년 때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을 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를 썼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천민성은 그 시대를 벗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자기 책임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오래 산다는 것은 꽤 알려진 속설이다. 90세 부고는 예삿일이고 100세도 드물지 않다. 마당발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가설도 세워 봄직하다. 자신을 숨긴 채 인욕하고, 웃음 지으며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인간들에게 깊은 내상을 안긴다. 그것은 지독한 감정노동이다. 그렇게 살아왔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내민 구원의 손길을, 어제까지 동지라고 생각해왔던 인간들이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것이 사건의 개요다. 지금은 후폭풍의 순간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 사회는 전근대성에 매몰돼 더는 탈출구가 없는 것 같다. 공개된 규칙은 없고, 사적 은밀성만 존재하는 나라요, 공적인 친교가 아니라 개인들의 은밀한 부패망이 지배하는 원시부족 사회다.

소위 네트워킹의 정체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부패 동맹이나 부조리의 결사를 우리는 종종 네트워킹이라는 묘한 말로 불러왔던 거다. 적이 없는 사람은 친구도 없다고 한다. 모든 사람과 호형호제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우애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소셜네트워킹은 결정적 순간에 삼류 영화 속의 도적 떼처럼 서로를 배신한다. 이번 사건이 그런 경우다. 대선후보 손학규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책을 썼지만 우리의 마당발들은 저녁은 세 탕, 아침도 두 탕을 뛰어왔다. 아니 정치인 대부분이 그렇게 정치인이 되었다.

갈수록 전근대적 배타성이 지배하는 협소한 연대의 사회다. 정치인들에게서 이념도 정강정책도 진정한 동지의식도 찾기 어렵다는 것은 희극이다. 정당은 봉숭아학당이 된 지 오래여서 무엇이든 고참순이다. 조폭을 방불케 한다. 국회의원들끼리도 형·동생을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역겹다. 뇌물 전과자도 수두룩하다. 전과자들이 위세도 등등하게 선량한 시민을 재단하는 곳이 청문회다. 우리의 주인공도 지난 정권 하에서 두 번씩이나 사면을 받은 분이시다.

대한민국은 법망이 촘촘해질수록 법치는 사라지고 그것을 우회하는 사적 네트워크의 필요성이 중요해지는 역설의 국가다. 돌아보면 우리 모두가 그를 이용해왔다. 법이 가까이 올수록 우리는 그를 찾았다. 법으로는 안 풀리는 무언가의 문제를 풀어줄 위대한 그의 존재 말이다. 그래서 그는 환영을 받았던 거다. 부패와의 싸움은 그럴 만한 최소한의 자격 있는 사람이 맡아야 뒤탈이 없다. “뭐라고. 네가 감히 나를 친다고!”라는 말이 나온다면 이미 틀려먹었다. “누가 총리로 만들어 주었는데…”라는 고함이 지금 ‘임금님 귀’처럼 대밭을 울리고 있다.

한국은 깊은 사상과 가치가 있어본 적이 없는 나라라는 비판도 있다. 되는 대로 산다는 뜻일 게다. 부정부패와 양반들의 가렴주구에 500년을 찌들어왔다. 야당이 평소답지 않게 왜 이리 조용한지 그게 궁금하다. 1년이면 새로운 비극적 사건이 터지기에 충분한 계절이 바로 4월이라는 것인지….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