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형제도 논란에 불을 지핀 영화 ‘살인의뢰’의 한 장면. 마사 너스바움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혐오는 자신의 약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며 “특정 범죄가 특별히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범죄자를 가중 처벌하는 데 반대한다”고 말한다. 미인픽처스 제공
최근 사형제도 논란에 불을 지핀 영화 ‘살인의뢰’의 한 장면. 마사 너스바움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혐오는 자신의 약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며 “특정 범죄가 특별히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범죄자를 가중 처벌하는 데 반대한다”고 말한다. 미인픽처스 제공
사람을 잔혹한 수법으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경찰에 검거됐다. 강력 사건 피의자는 보통 경찰 현장 검증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피의자는 조사 때 진술한 내용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범행을 재연한다. 경찰차에서 피의자가 내리는 순간 현장을 둘러싼 성난 시민들이 소리친다. 피해자 가족도 피의자에게 울분에 찬 욕설을 내뱉는다. 이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넷 게시판에는 “저 ‘인간 쓰레기’를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빗발친다.

[책마을] 인간을 지배하는 감정…감정이 지배하는 법체계
마사 너스바움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혐오와 수치심》에서 ‘흉악 범죄자는 영원히 격리돼야 한다’는 감정이 올바른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정치철학자인 그는 먼저 우리 사회의 법체계가 완전한 이성의 집합체가 아니라 다양한 감정이 반영된 것이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 감정 중에서 ‘혐오’와 ‘수치심’은 공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지니고 있는 취약성을 숨기려는 욕구에서 혐오와 수치심을 이용해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기 때문이어서다.

저자에 따르면 혐오는 더러운 물질이 자기 몸에 스며드는 듯 다가올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이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법의 기반이 되기엔 부적절하다. 지배 집단은 자신들이 지닌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과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혐오라는 감정을 특정 집단이나 사람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너스바움 교수는 “법에서 혐오가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하는 소음이나 악취 문제, 토지 용도를 제한하는 정도”라며 “혐오가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1차적 기반이 되거나 죄를 무겁게 하거나 줄이는 역할을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수치심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함으로써 나오는 감정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불안한 감정이지만 이를 해소하기 위해 특정 집단에 수치심을 떠넘기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저자는 범죄자 신상공개 등으로 죄인에게 수치심을 주는 처분에 반대한다. 이런 ‘낙인 찍기’는 인간이 지닌 평등한 인간 존엄성을 해칠 뿐, 범죄 예방 효과는 낮고 범죄자의 교화와 사회 복귀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전통적인 사회 규범 탓에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공동체주의와 인간을 사회 진보의 수단으로 보는 공리주의적 자유주의도 반대한다.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야 할 장애를 지닌 존재이자 마지막에 자연으로 돌아갈 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자는 것이 너스바움 교수의 핵심 사상이다.

책은 그동안 불편하게 여겨왔던 혐오와 수치심이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 문제로 작용했는지 깨닫게 한다. 해설을 쓴 김영란 서강대 법학대학원 석좌교수(전 대법관)는 “법적 판단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최근의 인지심리학적 이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를 활용하고 구체적인 사건들을 예로 들면서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논증하려는 시도 자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 책을 추천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