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한글 타자기 개발한 공병우
“장례식 치르지 마라. 쓸 만한 장기는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써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

국내 최초의 안과 의사이자 한글 타자기 개발자인 공병우 선생의 유언이다.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난 공 선생은 평생을 한글 대중화에 헌신했다. 1926년 평양의학강습소를 수료하고 같은 해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936년 일본 나고야제국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38년 서울 서린동에 한국인 최초로 안과 전문의원인 ‘공안과’를 열었다. 일제 강점기에 강압적인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반발로 ‘오늘 공병우 사망’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사재를 털어 한글 기계화 운동에 주력했다. 1949년 최초로 실용적인 세벌식(초성·중성·종성) 타자기를 개발했다. 이는 6·25전쟁 중 군에 납품되면서 대중화됐다. 1958년 최초로 콘택트렌즈를 도입했고 국산화를 선도했다. 1971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를 개발했다.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고 1988년 한글문화원을 설립해 한글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 자판 문제 등을 연구했다. 1980년대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이찬진 등 젊은 프로그래머와 교류했으며 이들이 국산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 한글을 개발하도록 지원했다. 1995년 3월7일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