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기업 구조조정 지원할 특별법 서둘러야
자신이 만든 신조어(新造語)가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시대와 현상을 꿰뚫는 용어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사회가 그 용어를 받아들이고 사용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아서다.

‘빅딜’이라는 신조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97년 12월16일, 외환위기 직후다. 삼성 현대 등 주요 그룹 기획총괄 임원들과 토론을 벌이다가 ‘그룹 간 사업교환’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 내용을 기사화하다가 고심 끝에 만들어낸 용어가 바로 빅딜이다. 중복과잉투자 해소를 놓고 골머리를 앓던 시기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던 김우중 씨가 용어를 받아쓰더니 며칠 뒤 대선에서 승리한 DJ가 주요 경제정책이라며 빅딜을 내세웠다. 빅딜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계기다.

하지만 빅딜에 대한 기억은 씁쓸하다. 실패로 끝나고 말아서다.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한 탓이다. 김대중 정부 스스로 빅딜을 ‘5대 실패정책’ 가운데 하나로 규정한 이유다. 기업의 구조조정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고 규제를 과감히 풀어 기업 스스로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교훈은 얻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머쓱하게 끝난 빅딜이다.

그리고 십수년, 기억을 되살린 건 며칠 전 삼성과 한화의 빅딜이다. 삼성의 4개 계열사를 한화에 넘기는 거래는 매매금액만 2조원으로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다. 더 중요한 것은 정부의 압박이 아닌 자발적 빅딜이라는 점이다. 여타 기업들도 대규모 사업 구조조정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산업계가 본격적인 구조 개혁에 나설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제야 용어의 주창자도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경제 여건이 과거 빅딜 시절만큼이나 좋지 않아서다. 사실 호황을 구가한다면 누가 굳이 구조조정에 나서겠는가. 그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다. 삼성과 한화의 빅딜도 마찬가지다. 구조조정 없이는 버티기 힘든 시기가 곧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기로에 선 한국 경제다. 강달러와 저유가는 세계 경제를 흔들고, 엔저는 한국 수출에 치명상을 안기고 있다. 일본에 휘둘리고, 중국에 밀려나는 ‘넛크래커 현상’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모든 게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성장이 뉴노멀이다. 한국 산업이 세계 경제의 대변화 속에서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문제는 기업들이 삼성이나 한화처럼 신속하고 효율적인 구조조정에 나서고 싶어도 이를 지원하는 제도가 터무니없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기업 구조조정 정책의 초점이 부실기업 회생에 맞춰져 있어서다. 재무구조개선약정 기업구조조정촉진법 통합도산법 등이 모두 그렇다. 사후 수술보다는 예방 주사를 맞는 편이 나은 법이다. 우량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지 않는 한 선제적 구조조정은 불가능하다.

일본이 1999년 제정한 ‘산업재생법’이 타산지석이다. 구조조정 계획이 있는 기업이 주무장관의 승인을 얻으면 금융 세제 공정거래법 상법은 물론 민법에서도 특례를 패키지로 지원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자산평가손의 손금산입 인정, 자본 감소 시 주주총회 결의 면제, 등록면허세 경감, 현물출자 시 가격조사 면제, 합병 시 주총 결의 면제처럼 평소에는 도무지 받기 힘든 지원을 한꺼번에 부여하는 식이다.

한계기업만이 아니다. 도요타 신일철 등 일본 유수의 대기업들도 이 법의 적용을 받았다. 생산성 재무건전성 사업혁신 등에서 성과를 거둔다는 조건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스미토모금속이다. 제조원가를 6% 낮추고, 종업원 1인당 부가가치액을 133%나 향상시켰으니 말이다. 장기 불황에서 탈출하는 데는 재정지출을 늘리는 것보다 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게 이 법의 교훈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특별법은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그러나 아직 재계의 일방적인 희망 수준이다. 정부는 여전히 ‘연구 중’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기업의 구조 개혁에도 때가 있다. 지금 내리는 비는 잠깐 오고 마는 소나기가 아니다. 장맛비다. 우산은 언제 만들려 하는가. 정부의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