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레빈 미국 상원 상임조사소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9일 기자회견장에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는 2년간의 조사로 밝혀진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의 불법행위가 나열된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2년 영국 투자은행 HSBC가 멕시코 마약밀매 조직의 돈세탁 창구 기능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레빈 위원장이 투자은행의 불법 영업에 다시 제동을 건 것이다. 초저금리 시대에 고수익을 좇아 금리 및 원자재 가격 조작 등 불법 영업을 하는 투자은행과 전 세계 당국 사이에 ‘벌금 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투자자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가격을 지배하는 투자은행
시장조사업체 CCP리서치파운데이션에 따르면 2009년부터 올 8월까지 전 세계 당국들이 투자은행에 부과한 벌금은 총 2604억달러(약 290조원)를 넘어섰다. 세계 66위인 벨라루스의 경제 규모와 맞먹는 금액이다.
투자은행들은 막대한 자본을 이용해 원자재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자사 소유의 원유 저장탱크와 파이프라인 등을 이용해 규정을 넘는 5500만배럴의 원유를 비축했고, JP모간은 미국 내 31개 발전소를 인수한 뒤 전기료를 조작했다. 미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는 지난해 JP모간에 전기료 조작 혐의를 적용해 4억1000만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외환시장도 마찬가지다. HSBC,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미국 씨티그룹과 JP모간, UBS 등 5개 은행 트레이더들은 메신저를 통해 환율 정보를 공유했고 공매도와 매수를 적극 활용해 은행에 유리하게 고시환율을 조작했다. 금융 당국들은 지난 14일 5개 은행에 33억달러에 이르는 벌금을 부과했다.
은행 간 자금 거래의 기준이 되는 리보금리 역시 투자은행의 조작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영국 투자은행 바클레이즈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다른 은행들과 밀약을 통해 리보금리를 조작했다. 리보금리는 영국은행연합회가 20개 은행을 대상으로 은행 간 차입금리 정보를 받아 제출된 금리를 평균 내 결정한다. 따라서 몇몇 은행이 금리를 낮춰서 제출하면 시장 금리와 무관하게 리보금리를 낮출 수 있는 구조다. 미 법무부와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이자비용 절감을 위해 금리 조작에 나섰던 바클레이즈에 4억5000만달러의 벌금을 물렸다.
불완전 판매·돈세탁도 마다치 않아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지난 8월 사상 최대인 166억5000만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납부하기로 미 법무부와 합의했다. 주택담보부증권(MBS)의 불완전 판매 행위가 문제로 떠올랐다. 씨티그룹과 JP모간 역시 MBS 판매와 관련해 각각 70억달러와 130억달러의 벌금을 맞았다. 이들은 2000년대 초 부동산시장의 호조세를 이용해 소비자에게 고지 의무를 다하지 않고 과도하게 MBS 판매에 열을 올렸다.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시장이 급격히 가라앉자 MBS 구매자들은 손실을 보게 됐고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으로 빠지는 계기가 됐다. 금융정보업체 샌퍼드번스타인에 따르면 JP모간과 BoA는 각각 4500억달러, 9650억달러어치의 MBS 관련 상품을 판매했다.
금융제재 대상국의 돈세탁과 부유층의 탈세를 도운 것 역시 벌금 부과의 또 다른 이유다. 올초 미 법무부는 BNP파리바에 이란 등 제재 국가의 금융거래를 도왔다는 혐의로 89억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미국인 고객의 탈세를 도운 혐의로 기소된 크레디트스위스에 26억달러의 벌금을 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