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깊어진 화학기업…'성공의 추억'서 탈출하라
한국 화학기업의 침체가 3년 이상 이어지면서 불황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산업경기나 중국 수요 감소를 불황의 원인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 산업경기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글로벌 화학기업들의 경영 실적은 양호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중국 수요도 2000년대의 두 자릿수 성장보다는 크게 둔화됐지만 6~8%로 양호하다.

현재 한국 화학산업의 불황은 범용제품 위주라는 구조적 경쟁력 문제가 가장 크다. 동아시아 역내 수요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데다, 중국의 현지기업 및 저가원료 보유 기업들과의 경쟁은 심화되고 있다. 고기능 제품이나 고부가가치 정밀화학 산업에서는 선진국 기업과의 기술력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의 화학기업들은 1990년대 이후 내수 침체 및 범용사업에서 후발기업의 거센 추격으로 구조적인 경쟁력 위기를 경험했다. 석유화학 사업에서 원료(Feedstock)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점도 한국과 공통인 약점이다. 그러나 유럽과 일본의 화학기업 중 경쟁력의 위기를 극복하고 양호한 사업 성과를 내는 기업들이 다수 있다.

독일 BASF는 사업이 레드오션화되기 전에 포트폴리오의 최적화 및 고도화를 실행해 사업의 차별화를 유지하고 성장을 지속시키는 대표 화학기업이다. BASF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중장기 전망에 따라 그린엘로브라운레드로 구분하고, 차별적인 실행전략과 자원배분으로 시스템적인 사업구조 조정을 지속하고 있다.

일본 도레이는 솔루션 전략으로 경쟁력의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도레이는 고객과 함께 신제품을 기획 및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보잉과 에어버스 비행기에 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을 적용해 장기공급 관계를 구축하고, 유니클로와 공동으로 히트텍 등 스마트 섬유·의류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벨기에 화학기업 솔베이는 사업의 질을 중요시하는 구조 전환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과거 주력 사업으로 글로벌 시장 지위를 갖고 있던 범용 플라스틱 중심 사업구조를 소량 다품종의 고부가가치 정밀화학 사업구조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까다롭고 복잡한 사업관리와 새로운 시장 진출, 매출 감소 등 또 다른 경영상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외형적인 매출 성장보다는 사업의 지속 가능성과 질적 성장을 중요시 했기 때문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유럽과 일본 화학기업들의 위기와 도전은 지속되고 있다. 타 지역보다 더 높아진 에너지 비용에 엄격한 환경 규제, 역내시장의 불황 지속, 주 경쟁자인 미국 화학기업의 화려한 부활까지 더해져 치열한 위기극복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는 한국의 화학기업들도 유럽일본 화학기업들의 어려움을 ‘남의 일’로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위기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경영진의 위기 인식 수준에 따라서 기업의 실행전략 수위와 추진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변화의 방향과 성격은 기업마다 차이가 크다. 기업의 사업구조와 규모, 보유 역량, 지향점에 따라 전략 방향과 실행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활동적 타성’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파괴적인 환경 변화에 직면해서도, 과거에 성공을 거둔 행동이나 조치를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 문제를 극복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런던비즈니스 스쿨의 도널드 설 교수는 ‘활동적 타성’에 빠진 조직의 행동 양식으로 “회사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반 걸음, 그러나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기에는 충분한 반 걸음만 내딛는다”고 설명한다.

일본 후지필름은 2000년대부터 주력 사업이던 사진용 필름 시장이 빠르게 축소되는 위기를 겪었다.

CEO 주도로 사업을 새롭게 정의해 헬스케어 및 고부가 산업용 필름시장을 개척하고 제록스와의 제휴를 통한 문서솔루션 사업을 시작하면서, 다시 건강한 성장이 시작되고 있다.

한국의 화학기업도 과거의 성공 경험에 안주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사업 영역과 운영 방식을 찾아 철저하게 실행하는 추진력을 갖춰야 한다.

임지수 <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jslim510@lger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