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소위 보편적 복지의 부도덕성 문제
민주주의가 일찍 발전한 나라에서 복지제도가 늦게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복지제도는 민주주의가 지체 과정을 거쳐 늦게 이식된 국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미국 스위스 등 민주주의가 비교적 자생적으로 착근한 곳에서는 복지 시스템의 정착이 늦거나 그 규모가 작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나 비스마르크 치하 독일에서 국민연금(1891년이다), 정년제도 등이 가장 먼저 제도화되었다. 물론 공무원 연금은 별개 문제로 영국에서 1834년에 개시되었다.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 제도는 전쟁 동원체제인 국민개병제의 결과다. 민주주의를 유보하는 대신 국가 혹은 독재자가 백성에게 내려주는 정치뇌물이 바로 복지였던 것이다. 복지가 권위주의 체제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이 때문에 나왔다. 한국의 의료보험(1977년), 국민연금(1988년)이 모두 박정희 시대에 설계되거나 전두환 시대에 제도화되었다.

선거가 복지를 만들어 낸다는 더욱 강력한 주장도 있다. 무상급식 등 공짜시리즈가 몇 차례의 민주적 선거과정에서 무한 확장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불행히도 ‘선거=복지’라는 등식을 웅변하고 있다. 남미나 남유럽 라틴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도 다를 것이 없다. 페론이즘이나 차베스주의는 사회적 뇌물을 사이비 이념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설익은 민주주의가 주권자로 선언된 민중들에게 주는 마약이다. 민주주의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곳에서는 복지가 점차 정치를 대체하게 된다. 인접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직면한 스웨덴이 서둘러 복지제도를 도입했다가 소련이 망하고 나자 그중 상당부분을 철회한 것도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복지제도의 정치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복지는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뇌물의 크기를 다투는 정치적 암거래로 전락시킨다. 무상급식에 더해 무상보육을 약속한 새누리당이나 무상보육에 더해 신혼부부에게 공짜로 집을 주겠다는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쟁적 제안도 그런 현상이다. 작은 오류를 더 큰 오류로 덮으려는 것은 정치적 호소가 마지막 단계에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민주주의가 깊은 국민들에게는 뇌물의 크기도 줄어든다. 개인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거나 자유의 기풍이 높은 선거민들에게는 뇌물이 잘 먹히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세금을 정치인들이 제멋대로 쓰자는 것이 복지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다. 체면과 위신을 모두 잃고 말았다는 미국 정치풍토에서도 복지축소를 내건 공화당이 최근 선거에서 이겼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다.

한국에서는 보편적 복지 3년 만에 예산 디폴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복지는 좋고 세금은 싫다는 여론은 심각하다. 작년에는 한 달에 1만원 증세안이 거부되었고 올해는 임대소득에 대한 소액의 과세안이 집값 떨어진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 복지에 필요한 세금을 부자와 기업으로부터 걷어내자는 여론이 대세라면 이는 도덕적 해이요 국민성에 던져지는 질문이다. 모두를 위한 복지기금을 소수의 부자에게 뒤집어씌우자는 주장이라면 시민적 덕성 따위는 한국인과 거리가 멀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차제에 선별적 복지는 서민복지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보편적 복지도 무차별 복지로 바꾸는 것이 맞다. 오도된 언어로는 실체 파악이 곤란하다. 잔여적 복지라는 말도 그렇다. 잔여라고 하면 쓰고 남은 것을 연상하게 된다. 서민복지에 그런 모욕적 외피를 씌울 수 없다. 복지는, 그것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한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의 도덕심’에 기초해 내 호주머니에서 주는 것이라야 한다. 국가가 개입할 여지도 없다. 그래야 인간 개개인의 자비심이 살아나게 된다. 지금의 복지에는 자비심도 감사하는 마음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곧바로 국가에 대한 뻔뻔한 청구권으로 전락할 뿐이다. 보편적 복지는 나의 의무를 국가에 떠넘기는 도덕의 타락과 같다. 선택적 복지 대신 서민복지라는 단어를 쓰자. 그게 바른 이름이다. 그래야 개인과 사회의 도덕심이 살아난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