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안락사와 존엄사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2005)에서 전신마비가 된 여자 권투선수는 수시로 자살을 기도한다. 의료진은 진정제를 놓아 자살을 막지만, 그를 딸처럼 여긴 매니저는 끝내 인공호흡기를 떼고 편히 죽음을 맞게 해준다. 의술 발달로 무기한 연명치료가 가능해진 현대의 고민이다.

안락사란 뜻의 라틴어 ‘Euthanatos’는 로마의 저술가 수에토니우스가 처음 썼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내의 팔에 안겨 빨리 그리고 고통을 맛보지 않고 자신이 바라던 대로 안락사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Euthanatos’는 ‘eu(좋은)+thanatos(죽음)’의 합성어로, 영어 ‘euthanasia’의 어원이다.

안락사는 근대의 산물이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에선 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자살과 안락사를 살인으로 간주했다. ‘suicide(자살)’란 단어도 17세기에 등장했고, 그 전까진 ‘self-murder(자기 살해)’로 썼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1515년)에서 중환자가 타인에게 자신의 죽음을 부탁할 수 있는 섬나라 왕국을 그렸다. 철학자 베이컨도 고통을 끊기 위한 안락사를 옹호했다.

소생 불가능한 중환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계속해야 하느냐는 아직 정답이 없다. 네덜란드(2001년), 벨기에(2002년) 등이 안락사를 법제화했지만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안락사를 도운 의사를 살인죄로 처벌한다. 죽을 권리(right to die)보다는 생명권(right to life)이 우선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락사는 환자의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적극적 안락사와,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이나 약물투여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가 있다.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이지만 소극적 안락사는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바꿔 인정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존엄사에 관한 첫 판결은 1976년 미국의 ‘카렌 퀸란 사건’이다. 식물인간이 된 카렌(당시 21세)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 제거 요청을 하자 뉴저지주 대법원이 허용한 것이다. 국내에선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이 있다. 자녀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했지만 병원 측이 거부하자 대법원까지 간 끝에 호흡기를 뗐다.

존엄사를 예고했던 말기암 환자인 미국 여성(29)이 지난 1일 약물을 먹고 눈을 감았다. 그는 5개월 전 존엄사를 허용하는 오리건주로 이주했고 마지막 소원인 그랜드 캐니언 관광도 했다. 하지만 죽을 날을 예고하고 언론 인터넷을 통해 널리 알리는 게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