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교도소의 진화
1757년 프랑스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시종 무관 다미앙이 파리 한복판 그레브 광장에 끌려 나왔다. 사형 집행인은 발갛게 달군 집게로 그의 살점을 도려내고, 칼을 쥐었던 손을 유황불로 태우는 등 온갖 극형으로 고통을 준 뒤 네 마리 말로 사지를 찢는 능지처참에 처했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형벌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중세는 말할 것도 없고 18세기까지도 범죄자에게는 사형이나 신체형을 가했다. 이들을 처벌할 때까지 가둬놓는 장소가 감옥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구금 공간이었지 처벌 공간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초기까지 거의 다 그랬다. 자유를 구속하는 게 곧 처벌이라는 인식은 훨씬 뒤에 나왔다.

현대적 개념의 감옥이 등장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이탈리아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가 《범죄와 형벌》에서 죄형법정주의와 고문·사형 폐지론을 주장한 게 1764년이니, 그 이론적 바탕이 정립된 것도 불과 250년 전이다. ‘형벌은 법률로 엄밀히 규정돼야 하고 범죄의 경중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에 따라 범죄자의 교화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이때부터 높아졌다.

감옥 시설에 관한 연구도 이어졌다. 1791년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덤은 죄수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원형 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일망감시시설)을 고안했다.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을 합성한 이 단어는 교도관 한 명이 중앙의 감시탑에서 원형으로 조성된 여러 감방의 죄수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스템을 뜻한다. 벤덤은 당시의 고문, 처형 등 무자비한 처벌을 대체하는 인도적 교화장치로 이를 고안했다고 했는데, 훗날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개인이 말살되는 현대의 감시·통제 메커니즘으로서의 파놉티콘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때 감옥소, 형무소로 불렸던 교도소는 지금도 감시와 통제의 메커니즘 속에 있다. 그러나 교화 프로그램과 시설, 처우는 개선되고 있다. 교정의 날(10월28일)을 앞두고 공개된 서울 남부교도소는 최신식 고시원이나 다름없다. 교도관이 총을 메고 감시하는 첨탑도 없고, 쌀밥에 온돌방, 평면TV와 봉지커피 등 호화로울 정도다.

물론 안양교도소 등 오래된 건물들은 열악하다. 하지만 재건축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인근 주민들이 이전을 강력히 요구하고, 새로 옮겨갈 후보지에서는 반대 운동이 거세기 때문이다. 시설은 진화하지만 인식은 그대로인 모양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