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엔과 유로의 추락…'슈퍼 달러 시대' 재현되나
엔화와 유로화 가치가 추락하고 있다. 조만간 경기부양 차원에서 일본은행과 유럽중앙은행이 추가 금융완화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여 엔과 유로화 약세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슈퍼 달러’ 시대 재현과 다른 한편에서는 글로벌 환율전쟁이 본격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불균형과 환율전쟁을 줄이기 위해 안정책이 논의돼 왔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다. 가장 획기적인 조치라고 평가됐던 ‘경상수지 예시 가이드라인’과 같은 독일 등 흑자국에 대한 규제도 이행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체제 본질상 흑자국의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어 합의사항이 실행에 옮겨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2차대전 이후 달러화 중심의 현 국제통화체제가 갈수록 한계가 노출되는 데 있다. 현재 국제통화체제는 1976년 킹스턴회담 이후 시장의 자연스러운 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국가 간 조약이나 국제협약이 뒷받침되지 않아 “없는 시스템(non system)”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현 달러 중심의 통화체제는 국제유동성 공급과 신뢰성 간 상충관계인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에 빠져든다. 국제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돼야 하는데 이 경우 신뢰성이 떨어지고, 중심통화국이 대외불균형 해소를 위해 노력하면 국제유동성이 줄어들어 세계 교역이 위축되고 각국 경기가 침체된다.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엔과 유로의 추락…'슈퍼 달러 시대' 재현되나
트리핀 딜레마는 특정 국가(미국)가 중심통화국의 역할을 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현재 달러화 중심의 국제통화제도에서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심통화국은 기축통화 특권인 ‘시뇨리지 효과’, 저금리 차입 등의 과도한 특권을 독점적으로 누리게 돼 다른 국가의 반발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중심통화국으로서 얻는 글로벌 시뇨리지 효과에 힘입어 민간소비를 연평균 0.6% 포인트씩 높일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미국 경제와 교역 규모에 비해 이런 특권이 너무 크다는 것이 중국 등 다른 교역국의 불만으로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중심권이 이동됨에 따라 더 높아지는 상황이다.

현재 국제통화제도는 실질 시스템이 아니므로 중심통화 신뢰성이 크게 저하되더라도 이를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미국은 경기활성화 등을 위해서라도 대외불균형을 시정하려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국은 이를 조정할 유인이 별로 없어 글로벌 환율전쟁이 수시로 발생한다. 국제통화제도 개혁 필요성에 공감하는 대부분의 학자는 불균형 조정을 강제할 수 있는 국가 간 조약(1980년대 플라자협정)이 있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자유변동환율제인 현 국제통화제도가 전제로 하는 자본의 국경 간 자유로운 이동이 신흥국 외환위기의 주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신흥국은 외환위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불규칙한 자본유출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외환보유액을 확충했다.

현 국제통화제도의 이런 본질적인 한계가 극복되지 않으면 최근 달러화 강세가 슈퍼 달러 시대로 진화할 가능성은 낮다. 달러 강세는 경기회복과 같은 미국 자체적인 요인도 있으나 엔화와 유로화 약세에 따른 반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 때문에 세계경제와 국제금융시장 안정 차원에서 새로운 중심통화의 필요성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 달러 이외 특정국 통화가 새로운 중심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거래적 동기, 가치저장 기능, 회계 단위 등 화폐의 본래 기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 중심통화는 특정국 국민 이외에 세계 국민이 사용하기 위해 다자 기능을 함께 충족해야 가능하다.

이런 요건을 갖춰 특정 통화가 새로운 중심통화로 도입돼 정착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해야 한다. 이 때문에 금융위기 이후 국제통화제도는 새로운 중심통화를 도입하는 방안(트랙Ⅱ)보다 현 통화체제 단점을 보완하는 수정된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현 통화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인 트리핀 딜레마를 완화하기 위해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마련된 ‘경상수지 예시 가이드라인’ 정신을 재확인하고, 이미 실행에 옮기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 대신 현 중심통화국인 미국이 갖는 과도한 특권을 완화하기 위해 중국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꾸준히 추진하고, 유럽국은 유럽통화동맹(EMU) 체제를 공고히 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신흥국의 과다 외환보유액 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글로벌 금융안전망(GFSN·global finance safety net) 구축에도 더욱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높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