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러시아 제재에 ‘시늉’만 했던 유럽연합(EU)이 29일(현지시간) 미국과 보조를 맞춰 경제 제재에 동참함으로써 서방과 러시아의 ‘총성 없는 전쟁’의 막이 올랐다. 서방국가들은 “EU와 미국에 미칠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러시아 경제를 압박하는 강력한 제재”라고 하지만 역풍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냉전 이후 최악의 러시아 제재

오바마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
EU 28개 회원국은 이날 러시아의 금융·군수·에너지기업에 대한 광범위한 제재 조치에 나서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국영은행의 유럽 자본시장 내 주식·채권 발행 금지, 러시아에 대한 신규 무기수출 금지, 원유시추 및 군수 관련 장비 수출 금지, 푸틴 측근에 대한 자산동결 등이 골자다. 구체적인 내용은 31일께 발표되며 다음달부터 이행에 들어간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냉전 이후 EU의 러시아 제재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국영은행인 대외무역은행(VTB)과 자회사 뱅크오브모스크바, 러시아농업은행 등 3개 은행에 대해 미국의 주식·채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추가 제재를 발표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신냉전으로 봐야 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무기를 제공할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러시아가 치러야 할 비용은 더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 피격사건 전까지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이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이날 “이번 조치는 불가피하다”며 “러시아의 태도에 따라 추가 조치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러 은행 기업 자금조달 ‘빨간불’

푸틴 대통령
푸틴 대통령
뉴욕타임스(NYT)는 서방 제재가 러시아의 ‘캐시카우(현금창출원)’인 원유산업을 정조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방국가들이 원유시추 기술 수출을 차단하면 러시아의 유전 개발이 어려워질 것이란 점에서다. 마이클 레비 외교협회 에너지담당 애널리스트는 “러시아 원유시추는 아직 서방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며 “러시아와 친한 중국 기업들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단기적으로 러시아 은행과 기업들의 자금 사정에 ‘빨간불’이 켜졌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가 1998년 채무불이행(디폴트) 이후 국제시장에서 조달한 돈이 6000억달러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이 가운데 달러 및 유로화 채권발행 잔액이 1650억달러다. 이안 헤이그 파이어버드 매니지먼트 이사는 “서방에서 막힌 돈줄을 중국 은행들이 충분히 메워줄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 러시아 중앙은행이 외환보유액(5000억달러)을 풀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고 물가가 치솟을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유럽 경제도 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러시아에 에너지 및 군수 물품을 수출해온 독일과 프랑스 기업의 타격도 불가피하다.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인 로즈네프트 지분 20%를 갖고 있는 영국 석유회사 BP는 “이번 제재가 러시아 사업에 충격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푸틴의 선택은?

계속되는 제재에도 상당수 전문가는 푸틴이 ‘굴복’할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후 푸틴의 러시아 내 지지율이 80%까지 높아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날 “미국은 이번 제재로 인한 실질적 손실을 곧 느끼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러시아 제재가 미국 경제에도 상당한 타격을 입힐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은 아직 대(對)이란 제재처럼 러시아 기업의 달러 거래를 중단시키는 등의 조치는 내놓지 않았다. 만약 푸틴이 계속 버티면 서방은 더 강한 카드를 꺼내야 한다.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김보라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