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기업가에게 자유를 허용하라
오늘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64년 되는 날이다. 한국은 6·25전쟁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 2500만명 중 300만명이 사망하고 국토의 4분의 3이 초토화됐다. 그야말로 전쟁의 잿더미에 올라앉은 것이다. 1953년 정전 당시 1인당 소득은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해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으며, 1964년에야 겨우 100달러에 이르렀다. 물자는 태부족했고 산은 온통 민둥산이었다.

그랬던 한국이 지금은 1인당 소득 2만4000달러를 넘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 가히 경이적인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부르곤 했던 “메아리가 살게 시리 나무를 심자”라는 ‘메아리’ 동요는 초등학교 음악책에서 진즉 사라졌다. 삼림이 울창해져 더 이상 부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상에 출현한 후 대략 90%의 기간을 수렵·채취생활을 했다. 씨·부족을 형성하고 살았던 소규모 대면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질서는 수확물을 고르게 나누고 서로 보살피며 사는 것이었다. 그런 사회에 친숙한 원시 감정은 그렇게 형성됐다.

수렵·채취와 농경 시대를 지나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며 인류의 협동 방식이 변하면서 부가 빠른 속도로 축적됐고, 지금 사람들은 대규모 익명 사회에 살고 있다. 생산은 자신과 주변의 몇몇 사람들보다는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협동은 익명의 사람들이 다른 익명의 사람들을 위하는 방식으로 판이하게 바뀌었다. 나눔도 보잘 것 없는 소규모 나눔에서 대규모 나눔으로 바뀌어 모든 사람들의 삶이 개선됐다. 그런데도 소규모 대면 사회에 익숙한 원시 감정은 거의 바뀌지 않아 원시적 나눔의 공동체 사회로 회귀하려는 본능이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 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요즈음 한국이 그런 형국이다. 그동안 애써 모은 뒤주의 곡식을 두고 어떻게 나눠먹을 것인지 골몰하고 있다. 각종 무상 정책, 경제민주화, 동반성장, 출자구조 제약, 기업이 유보하고 있으면서 투자하지 않는 자금에 세금을 매기자는 엉뚱한 발상 등 일련의 움직임이 그렇다. 대부분 나라 경제의 미래와 관련된 것들이다. 특히 의도했든 또는 의도하지 않았든, 혹자에게는 조금은 많게 또 다른 혹자에게는 조금은 적게, 모든 사람들의 뒤주에 곡식을 더 채워주는 돈 잘 버는 기업들을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다.

삼성전자의 2분기 이윤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이윤은 항상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현명한 기업가가 뭔가 시장에서 저평가된 생산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제품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과정에서 그런 사실이 알려지고, 새로운 진입자들에 의해 요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 요소 가격은 오르는 반면 제품 생산은 늘어나 그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나가는 기업이 많은 이윤을 내는 이유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발견해 나가기 때문이다.

세계 일류 반열에 오른 한국 기업들이 지금 당면한 과제는 이제까지 세상에 없었던 물건을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이윤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를 걱정하는 기업가의 머리는 그것만으로도 지끈거려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국회는 기업을 옥죄는 법률을 양산하고 있다.

시장을 주도하고 확장해 나가는 주체는 누가 뭐래도 기업가다. 아무도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대신해 줄 수 없다. 국회와 관(官)을 비롯한 제3자들의 역할은 기업가들의 창의적이며 도전적인 행동을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 상업 활동을 제한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고 기업가들에게 폭넓은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복잡하게 얽혀 정교하게 돌아가는 상업 세계도 외부 간섭이 임계점을 넘으면 복원력을 상실하고 순식간에 파괴된다. ‘메아리’ 동요가 초등학교 음악책에 다시 들어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김영용 < 전남대 경제학 교수 yykim@chonna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