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6·25다. 6·25전쟁 하면 대다수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부터 떠올릴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눴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고 남북한의 군인과 유엔군, 민간인을 합해 사망자만 최소 100만명이 넘은 비참한 전쟁이었다. 국토는 초토화되고 남북 분단은 고착화됐다. 부정적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6·25는 아무것도 남긴 게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잘 알려진 대로 동서냉전의 서막을 연 6·25는 한·미동맹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의 집요한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다. 한국은 전쟁 결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확고한 정치적 노선을 선택하게 됐다. 한·미동맹은 국방비를 절감케 해 안보에 무임승차하는 효과만 낸 것이 아니다. 한·미동맹은 선진국 자본들이 한국에 투자하는 안전장치였고 ‘수출한국’을 만든 대외무역도 이 때부터 활기를 띠게 됐다.

6·25는 무엇보다 남북한 인구구성에 결정적 변화를 만들어 냈다. 1945년 해방 당시 남한의 인구는 1600만명, 북한은 920만명이었다. 그런데 휴전을 한 1953년 남한은 약 2100만명, 북한 820만명이 됐다. 남쪽은 월남자(140만명)와 해외귀환자(120만명)를 포함, 무려 500만명이 늘어난 반면 북쪽은 100만명이나 줄었다. 월남인 중에는 지식인, 지주,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6·25로 북한에서는 인구가 급감했고 지식층이 대거 탈출해 일종의 집단 두뇌유출(brain drain)이 발생했다. 결국 북한은 한 세대를 넘기면서 완전히 지력부재 사회가 되고 말았다. 반면 한국에선 일종의 멜팅팟 현상이 나타나면서 도시화와 함께 큰 활력이 일어났다.

잔존하던 봉건적 질서를 파괴해 한국 사회를 초기화한 것이나 반공의식과 함께 결과적으로 개발독재가 가능케 한 것도 모두 6·25였다. 결국 어떻게 보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출발점이 민족사의 불행 6·25였다. 오늘 64주년을 맞아 6·25전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접근이 요구된다. 아픔과 상흔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그 결과들을 냉정하게 조명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