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금주령과 해제령
영조는 애주가였지만 흉년엔 어김없이 금주령을 내렸다. 궁중 제사에도 술 대신 차를 올리게 했다. 백성들은 제주를 냉수로 대신했다. 명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거나 외딴섬에 귀양을 보냈다. 가혹하다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임금들도 국가적 재난 때는 그랬다. 모두 곡식을 아끼기 위한 것이었다. 굶주림은 민란으로 번질 수도 있기에 더욱 경계했다.

대신들의 실언이나 망동 때문에 술을 금하기도 했다. 세조 때 영의정 정인지는 만취해 임금을 ‘너’라고 불렀다가 귀양을 갔다. 그러나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술에 관대했다. 어쩌다 금주령을 내려도 할아버지처럼 처벌하지는 않았다.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고 효과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20~33년 미국에서도 온갖 금주 해프닝이 벌어졌다. 술 제조와 수출입을 금지하자 밀주와 밀수가 판을 쳤다. 그 바람에 알 카포네 등 갱단이 생겼다. 로버트 드니로가 알 카포네 역할을 맡은 영화 ‘언터처블’도 그 시절 얘기다. ‘고상한 실험(noble experiment)’으로 불렸던 금주법은 뒤에 ‘허무맹랑한 발상’을 빗대는 말이 됐다.

옛 소련도 금주 조치로 보드카 값을 올리고 생산을 줄였다. 그랬더니 알코올 중독이 더 늘었다. 술꾼들이 더 해로운 대용품을 마셨던 것이다. 이란 역시 1979년 혁명 이후 술을 금했지만, 지금 음주 인구는 100만명을 넘는다. 그 중 30%가 여성이다. 사실 집에서 몰래 마시는 것까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마자 공직 사회에 금주령이 내려졌다. 외식은 하지 말고 구내식당을 이용하라는 지시가 뒤따랐다. 청사 주변 식당가에는 감찰반이 파견됐다. 어느 장관은 국장급 이상 전 간부에게 “집에서도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지났다. 된서리를 맞은 식당들의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문 닫는 곳도 생겼다.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복무지침을 바꿨다. 부총리는 “구내식당을 한 달에 한 번 닫고, 주 1회 이상 청사 인근 음식점을 이용하게 하겠다”며 공무원 복지포인트 조기사용까지 독려하고 나섰다. 한 편의 코미디다. 언제부터 술 마시지 말고, 언제부터는 마셔도 되며, 어디서 무엇을 더 사라는 지시가 아직도 가능하다니….

이젠 “무슨 술을 몇 잔씩 마셔야 하는지도 정해야 하지 않나” “안방 잠자리까지 규제하려 들겠네” 등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하긴 늘 금지령만 있고 해제령은 없는 골프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