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소셜커머스 업체 위메프가 업계 1위에 올랐다. 월 거래액 160억원대로 업계 3위에 머물렀던 위메프는 지난해 12월 거래액을 1500억원으로 끌어올려 경쟁사인 쿠팡과 티켓몬스터를 제치고 단숨에 1위로 뛰어올랐다. 사이트를 찾는 이용자 수에서도 경쟁사를 따돌렸다.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위메프는 작년 12월 소셜커머스 분야 PC·모바일 순방문자 수 1위에 오른 뒤 최근까지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공격적인 마케팅 덕분이다. 구매금액 5% 적립 이벤트부터 시작해 최저가 보상제, 무료 배송 서비스까지 ‘업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파격적인 행보가 이어졌다. 톱스타 이승기·이서진을 내세워 대대적인 공중파 TV 광고를 내보냈다. 지난 연말엔 10만명 선착순으로 구매금액의 50%를 적립해주는 이벤트도 진행했다.

경쟁사들이 혀를 내두르는 위메프의 공격 경영 뒤에는 숱한 기행으로 유명한 허민 원더홀딩스 대표(38)가 있다. 그는 지난해 7월 새로운 사업 구상과 야구선수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위메프 공동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위메프 지분 100%는 여전히 허 대표와 특수관계인이 갖고 있다. 지난해 361억원의 영업손실을 감수하고 광고선전비와 판매촉진비를 각각 286억원과 343억원 쏟아부은 데에는 허 대표의 결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서른두 살에 3000억원대 자산가

“불가능의 반대말은 가능이 아니라 도전이다.” 허 대표의 이 말은 그의 족적을 잘 요약해준다. 서울대 응용화학부 95학번으로 입학한 그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최초의 사건은 1999년 서울대 첫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으로 뽑힌 것이다. ‘광란의 10월’이란 이름을 선거본부 명칭으로 정한 그는 후보자들의 공동 선거유세 대신 학생회관 앞에서 혼자 힙합 춤을 추거나, 인터넷 홈페이지에 선거 공약을 알리는 파격적인 행보로 기존 학생운동권의 방식에 신물이 난 학우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총학생회장이 된 그는 저항문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학교 축제를 대중가수 공연, 스타크래프트 대회 등 ‘재밌는 놀이’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1년 친구들과 ‘네오플’이란 벤처 게임회사를 차렸다. 2000년 ‘캔디바’라는 소개팅 게임을 만들어 제법 돈을 번 경험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 창업 후 만든 18개 게임은 모조리 망했다. 2005년에 이르자 빚이 30억원으로 불어났다.

“실패는 나에게 좌절을 의미하지 않아요. 오히려 다음을 위한 성공 예감이라고 할 수 있죠.” 옛날 일을 돌아볼 때면 허 대표는 항상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보면 단번에 성공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학생들이 한 번에 대학 들어갈 때 나는 재수를 해야 했고 사업을 할 때도 18번 실패를 겪었다”며 “그래도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성공을 위한 초석이 되리란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믿음대로 2005년 8월 출시한 게임 ‘던전앤파이터’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2008년 중국에 진출한 던전앤파이터는 서비스 한 달 만에 중국 온라인게임 1위에 올랐다. 2009년 말에는 동시접속자 수 220만명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연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다. 한때 빚더미에 올랐던 그도 2008년 넥슨이 3800억원을 들여 네오플을 인수하면서 3000억원대 청년 자산가로 탈바꿈했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 때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클볼 인생

과감한 도전과 불굴의 의지로 성공을 일군 경영자는 많다. 허 대표가 다른 경영자와 다른 점은 자유분방함에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를 ‘기인(奇人)’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런 기행 속에서 그의 인생관과 경영 철학을 엿볼 수 있다.

회사를 매각한 허 대표는 불현듯 미국으로 떠났다. 고등학교 때의 꿈인 음악을 배우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음악적 재능과 기술이 없던 그는 당연히 버클리음대 입학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뉴욕에서 어학연수를 받으며 6개월에 걸쳐 버클리대 입학 담당관들에게 이메일 공세를 펼쳤고 마침내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음악보다 더 큰 꿈이던 야구에 대한 열망도 되살아났다. 그는 너클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너클볼 투수 필 니크로(1997년 명예의 전당 헌액)에게 수백통의 이메일을 보내 결국 그의 제자로 들어갔다.

허 대표는 미국으로 유학간 데 대해 “평생 쓰고 남을 돈을 벌었지만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며 “길어야 백 년 사는 찰나의 인생에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를 돈 많은 사람의 부러운 취미 생활이라고 성급하게 판단내릴 수는 없다.

허 대표는 “나는 게임 디렉터 출신이고 게임적인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고 서비스를 만들어낸다”며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나 스포츠가 비즈니스적 영감에 아주 큰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위메프 경영진은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필수로 잘 해야 하는데, 게임을 통해 비즈니스에 필요한 전략과 타이밍을 배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투자 지주회사 원더홀딩스를 세우고 2010년 10월 자회사로 위메프를 창업했다. 이듬해 9월엔 경기 고양시에 독립야구단인 ‘고양원더스’를 창단하고 단장이 됐다. 원더홀딩스는 위메프와 고양원더스 외에 모바일 게임 회사 등 10여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의 자산은 1조원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새로운 도전을 위해 지난해엔 미국 독립야구리그 중 하나인 켄암리그의 락랜드볼더스 투수로 정식 등록했다. 데뷔전에서 1피홈런 5피안타로 5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됐다. 하지만 처음의 실패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다음달 등판을 앞두고 열심히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허 대표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너클볼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무회전으로 던져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는 탓에 던지는 투수 자신도 어떻게 공이 휠지 모르는 너클볼이 자신의 삶과 비슷하다는 의미다.

■ 허민 대표 프로필

△1976년 부산 출생 △부산 대동고 △서울대 응용화학부 입학(1995) △서울대 총학생회장(2000) △네오플 창업(2001) △버클리음대 입학(2009) △위메프 창업(2010) △고양원더스 창단(2011) △미국 독립야구리그 락랜드볼더스팀 입단(2013)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