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양보할 수 없는 삶의 덕목들
개는 푸른 하늘을 쳐다본 적이 없다. 먹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는 푸른 하늘 따위는 아예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나톨 프랑스라는 작가가 남긴 말이다. 먹고 사는 일의 다급함에 몰려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요 관심사가 돼버린 사회에서는 ‘푸른 하늘’에 눈길을 돌리는 짓은 사치스런 여유 부리기나 더러는 어리석음으로 매도당한다. 물론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삶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다. 돈 버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돈은 필요하지만 돈으로 대신할 수 없는 삶의 가치들이 분명히 있고, 그것들을 짓뭉갤 만큼 돈이 중요하지는 않다.

일부 대학교에서 벌어졌던 인문학과 통폐합 소동이 한심했던 것은 돈 되는 것의 가치가 그 이외의 다른 삶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는 천박한 발상 때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를 따지고 가르친다. 한데 대학이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인문학과의 통폐합에 신바람을 냈다.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대학 스스로 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몰지각의 극치다. 살아보니, 사람은 실용성만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당장 돈이 되는 것들은 아니지만 교양, 깊은 사색, 독서, 상상력, 창의력, 타자에 대한 이해, 진리에 대한 갈망 따위는 풍요롭게 사는 데 필요한 덕목이고 가치들이다. 이런 덕목과 가치를 길러주는 게 인문학이다. 그것을 깡그리 부정하고 외면하는 사회는 황폐화되고, 결국은 공멸로 질주한다.

돌아보니, 나 역시 돈을 좇고 소유에 집착했다. 평수가 더 큰 아파트를 사고,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 남에게 베풀고 돕는 일에는 인색하게 굴고, 더 큰 것을 바라고,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했다. 생각해보나 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다.

물질의 양적인 증대를 위해 달려가는 사람에게 삶을 향유할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 부질없는 것을 좇느라 시간이 흩어져버리는 까닭이다. 그 질주, 그 맹목의 추구를 멈추고 바라보자. 2000년 전 말 구유에서 태어난 한 성인은 평생을 홈리스로 살았다.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G K 채스터턴은 집없이 살았던 그분을 기리며 이런 시를 썼다.

‘짐승들이 여물 먹고 침 흘리는 곳/그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그가 집을 갖지 않는 곳에서만/그대와 나는 집을 얻네/우리의 손은 만들고 머리는 안다/그러나 우리는 잃어버렸네, 오래 전에, 우리의 가슴을.’ 이 시는 우리가 가진 집, 돈, 명예, 지위, 권력 따위는 우리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우리에게 양보한 덕분이라는 것을 말한다. 집을 차지한 대신에 무엇을 잃어버렸는가를 돌아보자. 우리의 집은 커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지지 않았는가? 더 많은 물건을 사들이고 쓰지만 마음은 더 가난해지지 않았는가? 인류는 달에 갔다 왔지만 이웃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지 않았는가?

한밤중에 길을 걸을 때 중요한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곁에서 걷는 친구의 발소리다. 발터 벤야민이 했던 말이다. 한밤중 캄캄한 길 위에서 바로 내 곁에서 걷고 있는 친구의 발소리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됐던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중요하겠지만, 누가 우리 곁에서 걷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돈, 권력, 지위, 명예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더라도 가끔은 들길을 걷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한밤중 곁에서 걷는 친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밤하늘에 가득 뜬 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집도 읽고, 음악회도 가고, 연극도 보며 살자.

장석주 < 시인 kafkajs@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