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선경직물 증축 준공식을 마친 뒤 고 최종건 회장(오른쪽 세번째)과 고 최종현 회장(두번째)이 나란히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SK 제공
1962년 선경직물 증축 준공식을 마친 뒤 고 최종건 회장(오른쪽 세번째)과 고 최종현 회장(두번째)이 나란히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SK 제공
경기 수원역 뒤편 평동 4번지. 자동차들이 달리는 권선로 옆 공터에 2층 높이의 공장 건물 세 동이 서 있다. 옛 선경직물 퇴직자 모임인 ‘유선회’의 이용진 회장(84)은 14일 SK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 40주기를 맞아 이곳을 찾았다.

“창업주(고 최종건 회장)는 매일같이 공장 곳곳을 돌며 근로자들을 격려했습니다. 회사 주인이 솔선수범하니 임직원들이 많이 따랐지요.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 공장 터는 SK그룹의 모태다. 일본인들이 세웠던 직물회사를 인수해 6·25전쟁 후 잿더미 속에서 재출범시킨 것이다. 수원 평동이 고향인 최 회장은 신풍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1944년 수원으로 내려와 선경직물 생산부 수습기사로 취직했다. 건장한 체구와 성실함으로 경영진의 눈에 띈 그는 입사 6개월 만에 조장이 돼 100여명의 제직조 여공들을 이끌고 생산계획과 품질관리를 맡았다. 6·25전쟁 후 잿더미로 변한 공장에 돌아온 그는 정부로부터 회사를 인수하고 부품을 조립해 직기 4대를 만들고 공장을 다시 돌렸다.

“1955년에 입사했는데, 그때부터 최 회장은 직원들에게 기술력과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회장은 “당시 동대문시장에서 선경의 ‘닭표 안감’과 ‘봉황새 이불감’이 불티나게 팔린 것도 소비자들로부터 품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최 회장은 일본 화학섬유업계 대표들을 수원공장으로 초청해 신기술 정보를 교환하는 등 품질경영에 힘을 쏟았다. 1962년엔 국내 최초로 인조견직물을 홍콩에 수출하며 한국 섬유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직기 4대로 시작한 선경직물은 1965년 1월 직기 보유대수 1000대를 돌파하며 성장가도를 질주했다. 이후 선경화섬과 선경합섬을 차례로 설립하고 아세테이트원사, 폴리에스테르원사 등으로 분야를 넓혔다. 섬유산업의 수직계열화를 꿈꾼 최 회장은 원료인 석유화학과 석유정제 사업까지 진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선경석유를 설립한 지 4개월 반 만인 1973년 11월15일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영권을 이어받은 동생 고 최종현 회장은 사세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12월 대한석유공사 경영권을 인수해 SK를 섬유회사에서 에너지 전문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어 1994년엔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까지 거머쥐고 이동통신업에도 진출했다.

1998년 최종현 회장의 타계 이후 최태원 회장 체제로 접어든 SK는 2003년 4월 첫 시련을 겪었다. SK(주) 지분 14.99%를 확보한 헤지펀드 소버린자산운용이 2대주주로 등극해 경영진 퇴진 등을 요구한 소버린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2005년 3월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소버린이 완패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됐지만 후유증이 작지 않았다. SK는 지난해 하이닉스를 계열사에 편입해 에너지, 통신, 반도체의 핵심사업군을 완성하고 재계 3위 그룹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SK 임직원들은 이날 최종건 회장 40주기를 맞아 워커힐호텔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그룹을 이끌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 중인 가운데 고인의 차남인 최신원 SKC 회장은 “최근 그룹의 어려움으로 주위에 염려를 끼쳐 가족 대표로서 죄송하다”며 “이런 시련을 형제들이 힘을 합쳐 더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도 힘을 쏟겠다”고 강조했다.

박해영/수원=배석준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