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통계와 가학증
한때 대한민국 학생들의 영문법 실력, 특히 ‘명사’ 부문의 수준이 전 세계 최고일 것이라는 농담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학생들이 많이 보는 대부분의 종합문법책 첫째 장이 명사를 다루고 있었다. 영문법을 마스터하겠다는 큰 결심을 품고 두꺼운 책을 들고 씨름하다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명사 부분만 반복해서 보는 실태를 꼬집는 농담이었다. A로 시작되는 영어 단어 역시 한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수학도 마찬가지였다. 영문법의 ‘명사’처럼 수학 참고서에는 집합이 가장 처음에 나왔다. 어렵다는 미분과 적분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삼각함수에 이르기도 전에 지쳐 포기를 하고 한동안 수학 공부를 접었다가 다시 집합 부분부터 공부하다 또 포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렇게 되니 책의 맨 마지막에 위치해 있던 확률과 통계는 훑어보지도 못하고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 같다. 제대로 통계를 접해보지도 못하고 이후 삶에서 통계는 점점 우리와 거리가 멀어져갔다.

통계라는 단어를 접하면 가장 먼저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가 떠오르면서 어렵고 골치 아픈 학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국적을 불문하고 인지상정일 것이다. 해외 사이트에서 이런 유머를 본 적이 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넌 이제부터 통계학(Statistics)을 배우게 될 거야”라고 하자 학생이 반문한다. “가학증(苛虐症)을 다루는 학문(Sadistics)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비슷한 발음이 나는 단어를 가지고 장난하는 일종의 언어유희지만 통계학이 고통을 주는 학문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뼈 있는 유머다.

올해는 전 세계 108개 국가의 1400여개 기관이 참여하는 ‘세계 통계의 해’다. 사회현상이 복잡해지면서 통계의 위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으나, 삶의 질 향상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통계가 활용되고 있다는 인식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지정했다고 주최측은 밝히고 있다. 세계 통계의 해 홈페이지를 보면 ‘만약 통계가 없다면’이라는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만일 통계가 없었다면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인터넷은 데이터 수집, 분류, 우선순위 설정 등에 실패해 다양한 검색 결과를 제공하는 대신 클릭 한 번에 오로지 한 사이트만 보여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통계가 없는 세상은 인터넷이 없는 세상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우리 삶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는 추정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박형수 통계청장 hspark23@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