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은 말한다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지난 27일 오후 서울 도곡동 강남세브란스병원 중강당. 정호승 시인(사진)이 자신이 지은 시 ‘바닥에 대하여’를 낭독했다. 청중은 30명 남짓. 어떤 사람은 환자용 휠체어에 누워서 듣고, 어떤 이는 무언가에 의지해야 하는 듯 어머니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시를 듣다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도 보였다.

낭송회 청중들은 근육병을 앓고 있는 희귀난치성질환자와 보호자들이었다. 근육병은 몸이 점점 굳어지는 병이다. 이들은 먹는 것, 자는 것, 움직이는 것 무엇 하나 스스로 할 수 없다. 보호자와 24시간 한 몸으로 지내야 한다. 환자와 보호자 모두의 마음은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날 정 시인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과 사회공헌 기관인 희망네트워크가 희귀병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해 마련한 ‘마음 치료 프로그램’ 강사로 나선 것이었다. 주제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 마디’였다.

정 시인은 또 다른 시도 읽어내려 갔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낭독한 후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세요.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라며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로했다.

강의를 마친 뒤 정 시인은 “그분들의 고통을 실제 눈앞에서 보니 ‘견뎌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표현하기 힘든 고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고 느낌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보호자와 환자들의 밝은 표정도 볼 수 있었다”며 “그 표정 속에 있는 희망의 끈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강의를 들은 김종혁 씨(18)는 “바닥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바닥은 더 이상 좌절, 절망이 아니라는, 바닥은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는 말이요. 꿈이 작가였는데 꿈을 이룬 시인을 직접 만나니 글을 쓰고 싶어 했던 옛날 생각도 나네요”라고 소감을 말했다. 14세 환자의 엄마는 소감을 묻자 “딸이 나의 마음을 채워주고, 내가 딸의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강의였다”며 “딸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정 시인의 시낭송회가 끝난 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박남희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보호자들에게 “살면서 아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어떻게 보면 힘든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행복하기도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자”고 조언했다. 정봉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전무는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