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한양도성 따라 걷기
태조 이성계는 궁궐과 종묘를 완공한 이듬해 수도 방위를 위해 한양도성을 쌓았다. 1396년 1월9일부터 2월 말까지 1차 공사에는 11만8070명을 동원했다. 겨울공사는 농번기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해 가을걷이가 끝난 뒤 7만9431명을 다시 모아 공사를 끝냈다. 성곽은 석성과 토성으로 쌓고 그 사이에 4대문(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4소문(홍화문, 광희문, 창의문, 소덕문)을 뒀다.

한양도성은 주변을 둘러싼 북악산(백악산), 낙산(타락산), 남산(목멱산), 인왕산을 성곽으로 이어 평지성과 결합한 형태다. 산성과 도성을 일체시킨 한국식 축성은 고구려 때부터 이어진 양식이다. 총 길이가 18.6㎞나 되고 세계 최장기간인 514년 동안 도성으로 쓰여 지난해 말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도성의 원형은 지속적인 개축과 보수 덕분에 대한제국 시절까지 잘 유지했다. 1900년 숭례문 전차 공사 때도 문루와 성벽은 온전히 지켰다. 그러나 일제는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빌미로 숭례문 성벽을 무너뜨렸고 서소문 주변 성곽도 헐어버렸다. 서대문과 혜화문 철거에 이어 남산에는 조선신궁을 짓고 동대문 성벽 또한 없애버렸다.

복원사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문화재보호법 제정에 따라 시작됐고, 1968년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 급물살을 탔다. 지금까지 복원된 구간은 전체의 70%인 약 13㎞다. 외국 학자들은 1000만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에 이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은 성곽을 가진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며 부러워한다.

엊그제에는 축성 과정에서 성곽 돌에 구간별 책임자와 석수 이름, 지명을 새겨 넣은 ‘각자성돌’ 80개가 새로 발굴돼 눈길을 끌었다. 당시 97개 공사 구간에 이름을 붙이고 어느 지역의 누가 쌓았다는 것을 기록한 돌인데, 성벽이 무너질 때 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한 ‘공사 실명제’의 유물인 셈이다. 앞서 회현 자락의 도성터에서는 일제가 참배를 강요한 조선신궁의 콘크리트 잔재가 발견되기도 했다.

최근엔 조선시대에 성곽을 돌며 경치를 구경하던 순성(巡城)놀이가 되살아나고 있다. 순성놀이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도성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과거시험 보러 온 유생들이 장원급제를 기원하며 행했던 풍습이다. 순성 발길이 잦아지자 해설을 곁들인 자원봉사단체들의 탐방행사도 늘고 있다고 한다. 이제 폭염이 끝나고 바람이 선선해지면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도성에 올라 소원을 비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오랫동안 혼자 견뎌온 상처의 응어리를 풀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는 단독순례자도 있을 것이고….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