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홋카이도를 떠도는 징용자의 혼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선린외교를 펴야 할 나라가 일본인데 어디 그런가. 36년 동안의 식민지 피지배의 고통도 잊을 수 없는데 역사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종군위안부 부정 등 일련의 행위는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미워만 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 일본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한국문예창작학회가 국제문학심포지엄을 일본 홋카이도의 시베쓰시에서 갖기로 한 데는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화해의 길을 모색해보려는 의도가 가장 컸다. 지난 5일, 시베쓰시 문화센터에서 열린 심포지엄의 큰 주제는 ‘문학과 문화환경’이었다. 양 국가 문학과 문화에는 이질적인 요소보다는 공통분모가 더 많으리라는 전제 하에, 그것을 탐색하고 두 나라의 밝은 미래를 모색해보자는 의도가 담긴 주제였다. 일본인들은 여러 사람이 ‘빙점’이란 소설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코에 대해 발표했는데, 아마도 홋카이도가 이 작가의 태생지요, 작품의 무대요, 작가활동의 터전이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한국 시인 윤동주의 시 세 편에 왜 ‘순이’라는 여성이 등장하는지에 대해 발표했다.

심포지엄을 끝내고 한 홋카이도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슈마리나이 인공호수 근처에 있는 쇠락한 절터에 세워진 ‘조릿대 묘표(墓標) 전시관’이었다. 호수는 도쿄돔 30개가 들어갈 수 있는 엄청난 규모였는데 이 호수에 있다는 우류 댐에는 가보지 못했다. 인공호수 만들기, 댐 건설, 러시아를 잇는 메이우선 철도 건설에 3000명이 넘는 조선인 강제징용자가 동원됐다. 1943년에 완공된 댐의 높이는 45.5m, 당시로는 동양 최대 규모였다. 젊은이들이 홋카이도에서도 아주 북쪽, 기온이 영하 35도까지 떨어지는 이곳 공사장에 끌려와 추위와 병과 굶주림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밭에 쓰러져 죽었다. 그들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됐을까.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시체 발굴의 경위가 놀랍고 신기하다. 도노히라 요시히코라는 스님이 1976년 친구들과 슈마리나이 호수에 놀러갔을 때 한 할머니가 그들을 불렀다. 낡고 조그마한 절 고겐샤 본당에 잔뜩 있는 위패들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봐달라고 했다. 이 절은 쇠락해 상주 스님이 없었다. 위패를 보니 10대 후반과 20~30대 젊은 남자가 대부분이었고 일본인 외에 조선인 이름도 있었다. 사망 시기는 1935년에서 45년에 걸쳐 있었다. 도노히라는 위패의 주인공들이 댐 공사 현장의 희생자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내가 추리해보는 당시 사정은 이렇다. 공사 도중 사망자가 나오면 일본 당국은 시체를 절로 옮겼다. 몇 명 있던 스님은 허구한 날 들어오는 시체를 화장해 절 근처에 뿌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땅에 묻는 게 일과였다. 사망자에 대한 기록이 함께 전달됐는데 위패에 적어놓고 관도 없이 묻었다. 그렇게 묻힌 조선인의 수가 45명, 이 숫자는 이름이 밝혀진 것일 뿐이다. 1997년 ‘한일 대학생 공동워크숍’이 열려 시체 발굴과 유골의 유족 반환 운동이 시작됐다. 2001년, 이 운동의 이름이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으로 바뀌었다. 한국과 일본과 대만의 대학생들이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조선인 강제징용자 시체 45구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고겐샤 경내에 들어섰다. ‘강제노동자 묘관’이라는 한글 표지판은 두 동강이 나 전시관 바깥마당에 팽개쳐져 있었다. 일본 극우파의 소행인 것 같았다. 전시관에는 30여개의 위패가 있었다. 한국인 이름은 보이지 않고 일본인 이름만 보였다. 우리 일행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다.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다행히도 매·화장 인허가증 문서를 조사하고 기록에 남아 있는 한국과 일본의 본적지 주소로 유족을 찾는 편지를 보냈더니 답신이 제법 와 유족의 소재를 확인하는 경우도 나온다고 한다.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이 일본의 우경화와 군사대국화 흐름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아시아인의 연대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니 큰 기대를 걸게 된다.

시체 발굴 사업도 중단되면 안 되겠다. 이역 하늘 아래 눈도 못 감고 죽었을 그분들의 명복을 빈다.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