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직물회관에서 바라본 성 마리아 성당과 광장의 전경.
비오는 날 직물회관에서 바라본 성 마리아 성당과 광장의 전경.
시작은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정했다. 레일유럽 패스로 동유럽의 대평원 종단을 시작하기에 걸맞은 여행지니까. “당신이 지나고 있는 여기가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슈필만이 마지막까지 은신했던 그곳”이라고 가이드는 말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바르샤바에서 처음 들은 그 말은 막연히 상상했던 폴란드의 공기를 그대로 전하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어둡고 차갑고 침침할 것만 같은 동유럽의 정취를 상상했다.

◆바르샤바 구시가지, 중세를 복제하다

날이 밝자 얄팍한 지식과 간접경험으로 날조된 상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전례 없는 폭우로 40여일간 끊임없이 내린 비가 그친 하늘은 완연한 쪽빛이었다. 구시가지로 발길을 돌렸다.

1596년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긴 지그문트 3세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 잠코비 광장 왼편. 청명한 하늘 아래 고풍스런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섰다. 외형상으로는 여느 유럽의 구시가지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바르샤바의 구시가지가 가진 의미는 특별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옛 모습 그대로 완벽히 복원해 재건했기 때문이다.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은 덜하지만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폴란드인들의 힘과 뚝심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지 곳곳엔 볼거리가 넘친다. 바르샤바 기원설화의 주인공인 ‘샤바’라는 이름의 인어동상이 있는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거리 곳곳에는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예술가들로 활기차다. 구시가지 북쪽 경계에는 반원형의 모습을 갖춘 중세 성곽인 바르바칸이 있고, 바르바칸을 지나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박물관으로 보존된 퀴리부인의 생가가 있다.

구시가지 전체는 쉬엄쉬엄 걸어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만하다.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거리 곳곳에 설치된 쇼팽 벤치다. 버튼을 누르면 폴란드가 낳은 ‘피아노의 음유시인’ 쇼팽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음악을 배경으로 재건된 도시의 정취를 깊이 들이마시고 싶다면 꼭 앉아볼 것을 권한다.

◆빌라노프 궁전과 와이젠키공원
유물이 전시된 빌라노프 궁전 내부.
유물이 전시된 빌라노프 궁전 내부.

구시가지에서 차를 타고 바르샤바 남동쪽으로 20분가량 이동했다. 폴란드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다는 빌라노프 궁전을 보기 위해서다. 17세기의 국왕 얀 3세가 왕비를 위해 지은 여름궁전으로 왕이 서거한 뒤에는 각 시대에 유행하던 양식으로 개축됐다. 지금은 회화를 비롯한 미술품, 왕실과 귀족의 유물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의 기능을 하고 있다.

주변의 울창한 숲과 다양한 양식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정원 역시 폴란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빌라노프 궁전의 정원이 인공적으로 조성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데 비해 와이젠키 공원은 좀 더 자연 친화적이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함박눈처럼 내리는 민들레 홀씨는 가히 초현실적이다. 녹음은 짙고, 주변의 호수는 잔잔하며 우짖는 새 소리는 정겹다. 꿩과 청설모, 청둥오리가 자연스럽게 노닐고 사람들에게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국민 1인당 61%의 녹지율을 자랑하는 만큼 주변은 온통 초록이다. 도심 한가운데 자연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바르샤바 일정을 마치고 크라코프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를 거쳐 부다페스트까지 가는 동유럽 종단의 시작이다. ‘기차에 몸을 싣고 꿈도 싣고’라는 노래처럼 기차에 올라 차창 밖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여행자는 말랑말랑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기차를 타면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다른 이동수단보다 더 세밀하게 와닿는다. 그런 순간엔 대상에 대한 궁금증이 물밀 듯 커진다. ‘저 들판에 숨은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하루를 보낼까’. 어쩌면 이런 마음들이 여행을 시작하게 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풍경에 숨이 붙은 듯, 빠르게 뒷걸음질치는 동유럽 대평원에 마음을 빼앗길 즈음 검표원이 말을 건다. 기차표 하단에 탑승 날짜를 적었는지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서다. 깜빡하고 적지 않을 경우 무임승차로 간주하고 벌금을 내야 하니 주의해야 한다.

◆시간이 멈춘 도시, 천년 고도 크라코프
크라코프 구시가지를 달리는 관광마차.
크라코프 구시가지를 달리는 관광마차.

기차에서 내리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진다. 수많은 침략과 전쟁 속에서도 어떤 것도 파괴되지 않은, 본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크라코프는 바르샤바로 수도를 이전하기 전까지 중세 유럽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폴란드의 천년 고도다. 바벨 언덕 아래 비스와 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한 이곳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으로도 유명하지만 아우슈비츠,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구 시가지의 중앙광장(가로 200m, 세로 200m)을 중심으로 고딕 양식의 성모마리아 성당,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직물회관(그릇, 직물 등의 폴란드 특산품을 살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인 보이체크 성당, 귀족들의 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광장 주변으로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을 가득 채운 관광객들이 활기를 불어넣는다. 구시가지를 둘러볼 수 있는 관광마차가 일몰을 향해 달리는 풍경에 마음이 달뜬다. 중앙 광장 사이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누비다 보면 관광객의 발길이 뜸한 크라코프 본연의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세월의 흔적이 짙은 건물에 둥지를 튼 카페나 상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11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왕의 거처로 사용된 바벨성에 올랐다. 어느 곳이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가장 강한 권력이 장악하게 마련인 듯하다. 언덕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비스와 강과 구시가지의 풍경은 권력자에게 큰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 아래 살았던 사람들은 이곳을 올려다 볼 때 더 큰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바벨 대성당 때문이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옹기종기 붙어 서서 드러내는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무척 아름다운 대상을 바라보면 입체가 아닌 평면으로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벨대성당의 느낌이 꼭 그랬다. 성당 내부 역시 외형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내부에 전시된 왕들의 유물과 예술품을 둘러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다. 수세기에 걸쳐 군주들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됐고 성당 지하에는 군주들과 성직자들의 무덤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으로 떠나기 전까지 봉직했던 성당으로 유명한 만큼, 검사용으로 채혈한 교황의 피를 유리병에 담아 유물로 보관하고 있다.

◆어두운 지하세계의 경이,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중세의 크라코프가 동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을 찾았다. 당시 금보다 귀히 여겼다는 소금을 채취하는 광산이 ‘왜 자연유산이 아닌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헝가리의 킹가 공주가 결혼 반지를 던지고 찾는 과정에서 광산이 발견됐다는 설화를 들으며 400여 개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깊숙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듣는 경이로운 이야기와 눈으로 확인하는 모든 전경에 처음 가졌던 의구심이 풀렸다.

내용은 이렇다. 이곳의 많은 광부들은 소금을 채취하기 위해 지하 64m에서 시작해 지하 327m까지 들어갔다. 갱도의 길이는 250㎞. 이 엄청난 규모의 소금광산은 관광지로도 유명해서 코페르니쿠스와 괴테를 비롯한 유럽 전 지역의 문화예술가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무거운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새끼 말을 데려다 키웠는데,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말들을 광부들이 가족처럼 아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디 말의 일생만 먹먹하겠는가. 빛 줄기 없는 넓고 깊은 지하세계의 삶. 바깥 세상에서 공급해주는 물과 식량으로 영위하는 폐쇄된 삶. 수세기에 걸쳐 소금을 캐내야 했던 광부들의 고된 하루에는 귀의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일상을 조각한 작품들을 만들었고, 설화의 주인공인 킹가 공주를 위해 성당을 만들었다. 광물을 파내고 성경의 내용을 복기해 조각하며 자신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1896년에 시작해 1990년대까지 조각 작업이 계속된 대규모의 ‘킹가성당’은 소금광산 여행의 정점이다. 광부들의 노동에, 삶에, 마음에, 손길이 머물렀을 모든 것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바르샤바·크라코프(폴란드)=문유선 여행작가 hellomygrape@naver.com


◆여행 팁 동유럽 철도 무제한 이용 '레일유럽패스' 편리
만두와 맛이 비슷한 폴란드 전통음식 피에로기.
만두와 맛이 비슷한 폴란드 전통음식 피에로기.

폴란드에는 폴란드어가 따로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영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영어로 소통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화폐 단위는 즈워티 (zloty), 1즈워티는 354.71원이다. 신용카드도 사용할 수 있다. 유로는 일부 관광지에서는 사용할 수 있지만 거스름돈을 받지 못하거나, 환율을 손해 볼 수 있으니 유의할 것. 폴란드로 가는 직항편은 없다. 프랑스항공, 독일항공 등을 이용해 유럽을 거쳐 경유할 것을 추천한다. 바르샤바와 크라코프의 주요 관광지에는 트램이 운행된다.

유럽의 음식은 대체적으로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지만 폴란드 음식을 먹으면 한식이 생각나지 않는다. 동유럽에선 소고기보다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다. 삼겹살, 족발 등과 비슷한 식감의 음식을 만날 땐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뿐만 아니라 식전에 나오는 스프의 맛은 묵은지를 넣고 끓인 고깃국이나 돼지내장탕과 매우 비슷하다.

우리의 만두와 비슷한 식감과 맛을 자랑하는 피에로기는 꼭 먹어볼 것을 권한다. 저민 돼지고기나 치즈를 넣어 빚어 튀기거나 쪄 나오는 폴란드의 전통음식이다.

레일유럽패스는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의 국철 네트워크를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패스다. 초고속열차, 야간열차, 관광열차를 이용할 경우 예약은 필수. 구입 후 6개월 이내에 반드시 기차역에서 개시해야 한다. 가격과 일정 등의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raileurope.co.kr) 참조.

취재 협조=레일 유럽 (02)3789-6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