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푸르른 날에', 코믹한 통속극으로 풀어낸 '5월 광주'
연극은 ‘기억의 예술’이다. 안치운 호서대 연극학과 교수는 “연극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예술,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밝혀주면서 지속하는 예술”이라며 “기억의 매체 같은 말과 글과 몸이 한 곳에 모여 연극을 이룬다”고 했다.

서울 남산드라마센터에서 공연 중인 ‘푸르른 날에’(사진)는 푸르른 5월에 잊어서는 안 될 아픈 기억인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인생의 가장 푸르른 날을 역사에 빼앗긴 사람들의 비극’으로 무대에 되살린다.

극은 암자에서 수행 중인 스님 여산(속명 민호)이 옛 연인 정혜로부터 조카이자 딸인 운화의 청첩장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산의 기억을 좇아 무대는 30여년 전, 전남대를 다니는 야학 선생 민호와 찻집 아르바이트생 정혜의 ‘푸르는 날’로 돌아간다. 연인들의 오붓한 시간은 계엄군의 총소리에 깨지고 민호는 정혜의 동생 기준을 지키기 위해 도청으로 들어간다.

민호는 눈앞에서 기준과 제자 왕배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살아남기 위해 계엄군에 투항한다. 지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비겁하게 살아남은 민호는 고문 후유증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임신 중이던 정혜를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다. 딸 운화는 정혜를 짝사랑하던 친형 진호가 거둔다. 세월이 흘러 운화의 결혼을 앞두고 끊을 수 없는 인연에 애달파하는 민호. 결국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난 정혜와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송창식의 노래가 흐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줄거리만 보면 한없이 무겁고 감상적으로 흐를 것 같지만 연극은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을 오가며 경쾌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이라는 연출가 고선웅의 말처럼 가식적이고 과장된 신파 연기와 개그적인 동작과 말투 등 희극적인 연극어법을 많이 사용한다. 반면 물고문이나 격투 장면 등은 몸서리날 만큼 사실적이고, ‘그날 밤 도청’ 장면은 뮤지컬적인 군무가 곁들여지며 비장하게 묘사된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희화적으로 신파와 정극, 희극을 오가며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연출 솜씨가 탁월하다. 남산드라마센터의 극장 구조와 무대 장치들을 활용한 상징적이고 현대적인 무대 연출이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연극을 보는 재미를 더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기쁨과 분노, 슬픔, 즐거움 등 희로애락을 넘치도록 느끼게 해준다. 이를 통해 역사적 비극과 상처를 그 무거움에 짓눌리지 않고 조금은 홀가분하게 바라보고 기억하게 해준다. 공연은 내달 2일까지, 2만5000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