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풀면 인플레 유발? 오히려 물가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이 양적완화 정책을 펴면 물가가 오른다고 생각한다. 돈을 풀면 덩달아 물가가 오르는 건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여져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선 해리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올해 세계 경제 최대 화두는 미국의 시퀘스터(예산 자동 삭감)나 유럽의 경기침체가 아니라 인플레이션”이라며 “물가가 중앙은행들의 바람처럼 오르기는커녕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적었다.

BoA메릴린치가 집계한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르면 지난 3월 선진국들의 물가는 평균 1.3%(연율 기준) 오르는 데 그쳤다. 미국 중앙은행(Fed)이나 일본은행의 목표치인 연 2%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해리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양적완화를 지속하고 있지만 물가는 2011년 가을 이후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20년간의 데이터를 봐도 본원통화(중앙은행이 공급한 통화) 증가량과 M2(광의의 통화) 증가량 간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었다”며 “돈이 풀린 지 3년 이상이 지나면 오히려 물가상승률이 낮아지는 현상도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BoA메릴린치에 따르면 현재 미국, 캐나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일본, 스웨덴, 스위스 등이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물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왜 중앙은행이 돈을 푸는데도 시중 통화량은 증가하지 않을까. 해리스는 실업률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현재 미국과 유로존 등 선진국의 실업률이 자연실업률보다 높다는 것이다. 자연실업률은 물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실업률을 의미한다. 자연실업률은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이 반비례한다는 ‘필립스 곡선’ 이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즉 실업률이 너무 높아 물가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원자재 가격 하락도 한 요인이다. 2011년 세계적으로 원자재 가격이 크게 올랐는데, 이 시기가 소비자물가가 상승한 때와 일치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중국 경제 경착륙 우려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제자리걸음 중이다. 결과적으로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해리스는 “물가 상승을 유발할 수 있는 경제적 요인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