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세계적인 제약회사 노바티스의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의 국내 판매가격은 한 알(100㎎)에 2만1200원이다. 미국에서 팔리는 가격의 3분의 1로, 주요국 가운데서는 가장 싸게 팔고 있다.

노바티스가 글리벡의 국내 판매가격을 이처럼 낮게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양약품 때문이다. 백혈병을 치료하는 약효가 뛰어난데다, 가격(알당 1만660원)까지 저렴한 제품 ‘슈펙트’(성분명 라도티닙·국산신약 18호)를 일양약품이 2012년 1월 국내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노바티스는 강력한 경쟁 제품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처럼 높은 가격에 글리벡을 팔 수 없게 된 것이다.

일양약품의 지난해 매출은 1411억원이었다. 세계 3위 제약사 노바티스(566억달러·약 60조원)에 비하면 ‘400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 이렇게 작은 한국의 제약회사가 어떻게 해서 거대 다국적 제약사에 맞설 수 있었을까.

○다국적사도 놀란 신약 개발능력

김동연 일양약품 사장은 지난해 12월10일 미국 애틀랜타의 조지아월드콩그레스센터에서 열린 혈액학회(ASH) 행사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신들이 개발한 백혈병치료제 ‘슈펙트’의 ‘임상 2상’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노바티스 최고경영자(CEO)가 임직원 50여명을 대동하고 행사장에 직접 나타났다.

임상 시험 결과를 발표한 김성현 동아대 교수는 노바티스 경영진 앞에서 ‘일양약품의 슈펙트가 글리벡보다 안전성과 약효가 우수하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김 사장은 “학회에 참석했던 국내 교수들이 노바티스 경영진 앞에서 ‘한국의 조그만한 제약사가 만든 약이 초대형 다국적사 제품보다 더 낫다’고 발표했을 때는 정말 짜릿했고 흥분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슈펙트는 임상 2상 시험 결과 글리벡보다 약효가 25~50배 뛰어나고 독성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글리벡 내성 환자에 대해서도 약효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적인 뉴스 제공업체 톰슨로이터가 지난해 1분기 동안 세계에서 허가를 얻은 암 관련 제품 가운데 ‘가장 유망한 신약’ 4개에 슈펙트를 포함시킨 것은 이 같은 약효 때문이었다.

슈펙트는 지난해 9월부터 국내에서 ‘2차 치료제’로 판매되고 있다. 2차 치료제는 ‘1차 치료제’(글리벡) 처방을 받은 사람이 약을 먹었는데도 낫지 않거나 부작용이 생긴 경우에 쓰인다. 국내에서 ‘임상 3상’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아 ‘2차 치료제’로만 제한적으로 팔리고 있다.

일양약품은 한국과 인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5개국에서 임상 3상 시험을 진행 중이다. 이르면 올해 말께 임상 3상 시험을 마칠 계획이다.

○중국과 한국서 신약 인증받은 ‘놀텍’


일양약품이 신약을 내놓은 것은 슈펙트가 처음이 아니다. 역류성식도염 치료제 ‘놀텍’(국산신약 14호)을 2008년 10월 내놓았다. 놀텍은 한국과 중국에서 모두 판매 허가를 받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놀텍 개발 초기였던 2001년 일양약품은 중국 시장 진출을 겨냥해 현지 제약회사를 물색했다. 당시 연간 매출 300억원대였던 중국 제약사 ‘립존’이 눈에 띄었다.

김 사장은 “매출 규모는 작았지만 다국적 제약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연구진이 많다는 점을 높이 사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고 설명했다. 립존은 일양약품이 파견한 연구원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 내 임상 1상에서 3상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2007년 12월 ‘중국 신약 1호’로 허가를 따냈다. 한국 제약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았지만 자국 업체가 모든 임상시험을 관장했기 때문에 중국 국가식품약품감독관리국은 ‘중국 신약 1호’로 인정했다.

립존은 이후 ‘중국 신약 1호’ 타이틀을 앞세워 10년 만에 1조원의 매출을 자랑하는 회사로 급성장했다. 일양약품은 립존으로부터 놀텍 매출의 10%를 로열티로 받고 있다.

일양약품이 한국에서 놀텍 신약 허가를 받은 것은 중국보다 1년 뒤인 2008년이었다. 처음에는 위궤양 치료제로 시작했지만 지난해 시장 규모가 큰 역류성식도염 약으로 채택됐다. 덕분에 지난해 30억원이던 놀텍 매출이 올해 120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회사 명운을 건 신약 개발 투자

국내에서 개발된 신약은 SK케미칼이 국산 신약 1호를 1999년 내놓은 이래 지금까지 19개에 불과하다. 국산 신약을 3개 이상 보유한 업체는 없고 2개를 갖고 있는 회사도 동아제약, SK케미칼, LG생명과학과 중외제약, 일양약품 다섯 곳뿐이다. 중견 제약사 가운데서는 일양약품이 유일한 데다, 2개 신약 모두 최근에 나왔다. 상업적 성공 가능성도 높다. 다른 제약사 관계자들이 “일양약품 정도의 회사 규모에서 어떻게 저런 신약을 만들어냈는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다.

특히 백혈병 치료제 슈펙트는 일양약품이 심혈을 기울인 야심작이다. 11년 동안 400억여원의 개발비를 투입했다. 절대 금액은 크지 않지만 일양약품 수준에서는 회사의 명운을 건 승부였다. 그 결과 아시아 제약사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자체 백혈병 치료제’를 확보했다. 세계 최초로 나온 ‘글리벡’뿐만 아니라 미국 BMS의 ‘스프라이셀’, 화이자의 ‘보수티닙’ 등 매출이 수십조원 규모에 달하는 다국적 제약사들과 백혈병 치료제 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할 수 있게 됐다.

○백신공장으로 ‘또 다른 승부’

일양약품은 백신 사업에도 주력하고 있다. 충북 음성에 610억여원을 투자해 유럽 의약품품질관리기준(EU-GMP)을 갖춘 백신공장을 최근 완공했다. 연간 6000만명(도즈) 분량의 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 공장이다. 현재 국내에서 독감 백신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제약사는 녹십자가 유일하다. 일양약품이 오는 9월 판매를 시작하면 국내 백신 시장은 경쟁 체제로 바뀐다. 정부도 ‘백신 주권’ 확보 차원에서 일양약품의 가세를 반기고 있다.

안창남 일양약품 백신생산본부장은 “(일양약품 백신공장은) 전남 화순에 있는 녹십자 백신공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특정 지역이 오염되더라도 백신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일양약품이 백신을 내놓으면 국내에서는 ‘치료제’인 화학의약품과 ‘예방약’인 백신을 모두 갖춘 첫 제약회사가 된다. 안 본부장은 “인플루엔자 등 계절독감 백신에서 시작해 세포배양 백신 분야로 영역을 넓혀 회사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