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社 1병영] 이진발 광명유통 사장, '영하 15도 야간매복' 숫기없던 성격까지 바꿔
1975년 4월30일. 월남이 패망했다. 군에서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어떻게 자유국가가 공산국가에 패할 수 있을까.’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1970년대 초 대학입시에서 떨어져 당숙 밑에서 장사를 배우고 있었다. 당숙은 “대학 나와 선생하느니 차라리 장사를 배워 성공하는 게 나을 수 있다”며 자신이 일하는 서울 동대문으로 와서 밑바닥부터 훑으라고 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당숙 밑에서 그릇 파는 일을 배우던 중 22세인 1973년 말 군에 입대했다.

충남 조치원에서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경기 성남에 있는 부대에 배치됐다. 군생활을 한창 하던 중에 월남 패망 소식이 전해졌고 군대 안에는 비상이 걸렸다. 내가 근무한 곳은 파견부대였고 주로 경비업무를 담당했다. 일반적으로 후방의 파견부대라고 하면 편한 곳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상황은 달랐다.

우리는 실탄을 늘 휴대하고 군 주요시설에 대한 경계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밤에는 평균 세 시간씩 매복을 섰다. 겨울철 영하 10~15도를 오르내리는 야외에서 세 시간 동안 매복을 하고 나면 온몸은 얼어붙어 말 그대로 동태가 됐다. 일반 경계근무는 초소 안에서 서는 경우가 많아 움직일 수 있고 추위를 덜 수도 있다. 하지만 매복은 움직여도 안되고 소리를 내서는 더더욱 안된다. 탄창에는 100여발의 탄환이 들어 있다. 매복을 끝내고 내무반으로 복귀하면 오전 중 잠을 푹자야 하는데 월남 패망 소식에 엄청나게 많은 작업지시가 떨어졌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 부대 주변에 방공호를 팠고 막사 주변에는 흙으로 담을 쌓았다.

시골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입대 전에 농사 한 번 지어본 적이 없고 삽자루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군대에선 “야~시골 출신. 땅 한 번 파봐”라는 지시가 자주 떨어졌다. 그러면 ‘진짜’ 시골 출신에게 배워 삽질을 해야 했다. 부대원 중에는 농사를 짓다가 결혼해 자식까지 둔 ‘30대 노병’들도 여럿 있었다. 이들은 삽질, 모내기, 톱질, 대패질 등에 도사였다. 농번기에는 대민봉사 차원에서 주변 논으로 가 농사도 지어줬다. 모내기를 한 뒤 농민들에게 얻어먹은 새참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꿈에 그리던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배식차가 도착하면 고참인 내가 내려가 ‘네 살짜리 두꺼비(4홉들이 소주)’ 한 병 주고 고기를 조금 더 받아올 정도로 익숙해졌다. 제대 명령 날짜만 고대하고 있는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이른바 ‘8·18 도끼만행’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제대는 물 건너갔다. 완전군장 대기 상태에 실탄까지 지급됐다. 며칠간 군화를 신고 잠을 잤다. 명령이 떨어지면 출동할 채비를 갖춘 것이다.

9월이 돼서야 제대 명령이 내려왔다. 한 달 늦게 제대했다. 33개월 만기를 지나 34개월 만에 제대한 것이다. 군에서 한 달이 얼마나 긴지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그것도 제대를 기다리는 말년에 말이다.

제대 후 유통업을 하는 과정에서 외환위기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군에서 배운 인내심과 자신감, 그리고 ‘안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소심했던 내가 지금 광명상공회의소 부회장, 광명생활용품유통조합 이사장을 맡아 동료 기업인들의 애로사항 해결에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것도 군에서 배운 희생정신과 도전정신 덕분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