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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자칼럼] 레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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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net
    고대 그리스에서 레슬링은 거의 국기(國技)로 대접받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푸스의 신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이긴 것도 레슬링 시합에서였다. 헤라클레스가 사자와의 레슬링에서 승리했다는 것 역시 그리스인들의 자랑거리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레슬링을 뜻하는 단어는 이러한 인간과 야수의 싸움에서 유래됐다는 얘기도 있다.

    그리스는 레슬링 학교를 만들고 경기 규칙과 기술 규정을 정했다. BC 776년부터 열린 고대 올림픽에서 레슬링은 가장 중요한 종목으로 취급됐다. 최종 승부를 가름하는 마지막 종목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의 레슬링에 창의성을 더해 새로운 규칙을 제정했는데, 이것이 현재 그레코로만형의 원조인 셈이다. 하지만 로마에서 레슬링은 상업주의에 물들어 야만적인 격투시합으로 변질됐다. 중세 들어서 레슬링은 기사들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실력으로 자리잡았다. 16세기에는 레슬링 교본들이 엄청나게 쏟아질 만큼 일반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탱(1863~1937)이 근대 올림픽을 만들면서 레슬링을 주요 종목에 포함시킨 것은 이런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정신을 본받는다는 취지였다. 첫 올림픽인 1896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레슬링 시간 제한을 두지 않았다. 결승전에선 첫날 시합이 끝나지 않아 다음날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꽤 오랫동안 계속됐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도 레슬링 결승전이 9시간45분 동안 치러졌다. 지금의 2분씩 3라운드로 정착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스위스 로잔에서 집행위원회를 열고 레슬링을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물론 최종 결정은 9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서 위원들의 표결로 이뤄지겠지만 레슬링 선수들의 실망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닐 것 같다.

    소극적 경기방식으로 재미가 반감됐고 잇단 판정시비가 퇴출 이유라고 한다. 각국의 실력이 평준화되고 스타 선수가 나오지 않은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레슬링은 완전한 힘과 힘의 대결이다. 일체의 가식도 없고 체면도 없는 투기다. 하지만 TV 중계시대에 시청자의 관심에 걸맞은 콘텐츠를 개발하지 못하면서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다행히 태권도는 경기를 박진감 있게 운영하기 위한 지속적 개혁 덕에 정식종목으로 남게 됐다. 운동 종목도 끊임없이 혁신해야만 살아남는 시대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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