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마다 자금을 구하려고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신용등급이 A 이하인 중견기업들의 상황이 심각하다. 이들이 발행한 단기 기업어음(CP) 가운데 연내 만기가 돌아오는 물량이 46조7000억원이나 되는 탓이다. 올해 만기를 맞는 A등급 이하 회사채(24조원)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게다가 만기 물량은 2~4월에 몰려있는데, 기관투자가들은 우량기업 CP 아니면 투자를 기피하고 심지어 업황이 나쁜 일부 기업에 대해선 은행이 대출마저 꺼린다고 한다. 피가 마를 지경이라고 하소연하는 기업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금융회사들이 경기침체기에 리스크 관리를 강화해 재무 건전성을 높이려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과거 위기 때마다 정부가 관치금융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구조조정을 제대로 못해 좀비기업을 양산하고 말았던 경험을 숱하게 겪어왔던 바다. 그러나 비가 온다 싶으면 가차없이 우산을 뺏는 금융시스템 역시 문제가 크다. 특히 은행이 그렇다. 지금 같은 때에 은행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앞장서서 대출금을 회수하고 회생 가능한 업체에까지 등을 돌리면 버틸 수 있는 기업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유례없는 환율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중소·중견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주력사업 자체에 문제가 없는 우량기업도 일시적으로 자금흐름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삼성이나 현대자동차처럼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기업이 아니면 경기 사이클이 나빠질 때마다 모조리 죽으라고 내모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을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신용평가회사들이 업황이 나쁜 산업에 속한 기업들에 대해 대대적인 신용등급 하향을 경고하고 있는 마당이다. 기업이 어렵다는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자금줄을 끊어버린다면, 신뢰를 먹고 사는 금융이 클 수 없다. 무엇보다 은행들부터 자중해야 한다. 은행이 야단법석을 떨면 자본시장도 굴러가지 않는다. 금리기능이 작동하면서 숨통은 열어주는 것이 금융시장 본연의 역할이다.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냉탕·온탕이 문제의 본질이다. 기업 구조조정도 자금지원도 질서정연하게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