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몇 번째 실패입니까.”

조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84)은 백발의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렇게 역정을 냈다. 한국 과학기술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묻는 질문에 얼마 전 실패로 돌아간 나로호 3차 발사를 언급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백발의 노안에 지팡이를 짚어야 할 정도로 몸이 불편했지만 현실적 문제들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목소리에는 결기가 여전했다.

지난 28일 조 전 부총리의 서울 봉천동 자택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천서사(少泉書舍·소천은 그의 호)’라는 현판이 다가왔다. 그는 대선이 끝난 뒤 한국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묻는 질문에 “보수건 진보건 이념만 앞세워선 세상과 맞지도 않고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며 실사구시적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정을 주문했다. 인터뷰는 그의 고향인 강원도 강릉에서 올라왔다는 한과를 곁들여 두 시간가량 진행됐다.

▷요즘 경제가 무척 어렵습니다.

“한국 경제가 처한 문제는 상당히 풀기 어렵습니다. ‘퀵 픽스(quick fix·당장 효력이 날 수 있는 수단)’가 없어요.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오일쇼크나 외환위기(IMF) 때는 나름의 처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경제의 잠재능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국론마저 분열되고 있어요.”

▷세계 경제 위기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십니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성장이 ‘뉴노멀(new normal·시대가 바뀌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기준)’인 시대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어려울 겁니다. 미국 유럽 일본은 돈만 풀고 있습니다. 돈 푸는 게 정답이라면 벌써 문제가 해결됐을 겁니다. 문제는 실물에 있습니다. 금융으론 아무리 해도 안 되고 거품만 만들 뿐입니다. 심하면 금융위기를 다시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나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미국 사회에 대해 ‘임플로전(implosion)’을 얘기했어요. 내부파열입니다. 조화가 잘 안 되는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서로 융합해서 협조하고 함께 해법을 찾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줄었습니다. 감정적으로 대립하면서 구조적으로 합의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대선이 끝났습니다. 한국 사회는 이제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기존의 여러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사고를 혁신해야 합니다. 보수는 보수, 진보는 진보만을 기본 관념으로 해서는 세상에 맞지도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우선 국민 대표인 정치권과 지도층부터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실사구시적 패러다임의 설정이 필요합니다.”

▷성장과 배분(복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고정관념의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과거에는 양자택일식 논쟁들이 많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됩니다. 복지 없는 성장은 있을 수 없고 성장 없는 복지도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양자가 같이 가고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합니다.”

▷경제민주화 바람이 거센데요.

“경제민주화란 용어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체는 분명합니다. 시대의 요구죠. 경제민주화 정책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벌기업에 지금보다 더 많은 권한과 행동의 폭을 허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명박 정부 5년에 대해 평가해주십시오.

“공과가 있는 것 같아요. 공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등 대외 관계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낸다거나 선진사회를 만들기 위한 문제의식은 부족했습니다.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대비하는 게 국정을 책임지는 사람의 소임입니다.”

▷새 정부에 대한 당부의 말씀은.

“되풀이 말하지만,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개발연대부터 내려오는 관념, IMF 사태 이후 밀려온 신자유주의 등을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계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만 용써봐야 소용없어요. 또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봉사를 한다는 자세로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과 사명감을 갖기 바랍니다.”

▷박 당선인의 공약 중 특별히 챙겨야 할 게 있나요.

“민생에 대한 구체적인 공약은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감당해낼 수 있는지 미리 말해야 합니다. 최소한 재정집행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임기 5년만 보지 말고 10년, 20년 후를 생각해 기본 방향을 정하고 재정에 맞게 계획대로 집행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공약도 그 계획을 넘어서서는 안 됩니다.”

▷새 정부 초기 의욕은 상당할 텐데요.

“선거 과정에서 한 공약(公約)은 많은 경우 ‘빌 공(空)자’ 공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선거 운동 때 하던 공약을 모두 지킨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어요. 왜 그런지 대통령 지위에 서보면 알게 될 겁니다. 추후에라도 알게 되면 지체없이 버려야 합니다. 지도자의 용기와 덕목입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중산층 붕괴를 한꺼번에 막을 순 없어요. 중산층은 소득과 심리의 두 가지 부문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소득을 키워주거나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도록 해야 하죠.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 하고, 일자리 만들 수 있는 기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해답은 중소기업과 내수산업 육성에 있습니다.”

▷중소기업을 키우기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중소기업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또 정부가 돈을 빌려주는 것만으론 안 됩니다. 과학기술을 아는 사람을 기술자로, 경영을 아는 사람을 경영인으로 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고급 인력을 투입해야 해요.”

▷정부 조직개편을 놓고도 말이 많습니다.

“새 정부들마다 조직을 개편하고 정부 이름도 희한하게 바꿉니다. 왜 이름까지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기본적으로는 반대지만 현 상황은 개편해야 합니다. 특히 과학기술과 금융 관련 부문은 이대로 둬선 안 됩니다. 주무 부처가 없다보니 각 부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특히 통일된 과학기술을 육성하는 부서가 없어요. 나로호 발사 보십시오. 정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심해요. 과학기술은 국가 경제 발전의 기초입니다.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한국과 더불어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 3개국 지도자가 모두 바뀌었는데요.

“동북아시아 기류가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각축에다 미국까지 개입해서 전에 없이 험악한 정세입니다. 북한은 로켓을 발사하고 중국 말도 안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여건에서 반드시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긴장상태는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어떤 전쟁도 꼭 나야 할 전쟁은 없었습니다. 이런 걸 명심해서 대외정책을 해야 합니다.”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에 대해 조언하신다면.

“공정한 평가는 힘들 것 같군요.(웃음) 김중수 한은 총재는 아끼는 제자입니다. 전반적으로 무난하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지나치게 저금리를 고집하는 건 별로 좋은 정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금리가 실물에 미치는 영향도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미국 중앙은행이 실업률이 6.5%에 도달할 때까지는 무제한 양적완화로 간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정책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제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세상이라는 말이 많습니다.

“계층 간 이동성이 줄었습니다. 부자는 부의 세습, 가난은 가난의 세습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게 나라를 망치는 일입니다. 모든 문제는 과거부터 내려온 잘못된 정책의 산물입니다. 절대적으로 교육 개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육 개혁 하면 열이면 열 대학입시 개혁을 말하죠. 입시가 아니라 교육 내용의 개혁을 말하는 겁니다.”

▷교육 개혁의 방향성은 어때야 합니까.

“우리나라 교육은 세 살 때부터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이른바 ‘스카이(SKY)’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 다음은 돈 버는 거죠. 이런 것이 목표여선 안 됩니다. 교육 목표는 올바른 사람, 인재를 키우는 데 있어야 합니다.”

조순 전 부총리, 경제학자·관료·정치인…한국 현대사의 '산증인'

조순 전 부총리는 학자에서 관료, 정치인을 거친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관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으로 한국 경제개혁에 자신의 경제이론을 접목시키겠다는 나름의 결단이었다. 그 뒤 한국은행 총재(1992~1993년)를 거쳐 초대 민선 서울시장(1995~1997년), 한나라당 총재(1997~1998년) 등 정·관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명함에는 ‘서울대 명예교수’가 찍혀 있다. 그만큼 학자로서의 자부심과 열정이 강하다. 그가 1974년에 내놓은 ‘경제학 원론’은 전공 여부에 관계없이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읽어야 할 명서로 평가받았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중수 한은 총재, 박세일 한반도재단 이사장, 좌승희 서울대 교수 등이 제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올해 84세인 그는 최근 들어 대외 활동을 크게 줄였다고 했다. 35년된 그의 집, ‘소천서사’가 조 전 부총리의 글방이자 사무실이다. ‘서울 포청천’ ‘산신령’ 등 그의 별명은 강직한 원칙주의자로서 검소함과 겸손으로 살아온 조 전 부총리의 삶을 보여준다.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