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화랑가에 정통 회화의 가치를 일깨우는 전시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박수근 이대원 장욱진 등 작고 작가부터 백영수 문봉선 오치균 차영규 안윤모 박상미 씨 등 중견 작가들이 개인전이나 그룹전을 펼치고 있다. 출품작도 사진처럼 정교한 극사실주의에서 색면추상화, 순수 풍경화, 수묵 소나무, 건축이나 심리학을 융합한 ‘하이브리드 회화’까지 다양하다.

갤러리 현대와 가나아트갤러리, 국제갤러리, 선화랑, 학고재갤러리 등 메이저 화랑들이 겨울 기획전으로 회화 작가들을 초대했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아날로그 감성의 회화 작품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연말연시를 맞아 거실이나 안방에 걸린 옛 그림을 떼고 유망 작가들의 작품으로 교체하는 ‘벽갈이 마케팅’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가 이달 30일까지 여는 ‘회화의 예술’전은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자리다. 홍콩크리스티 경매의 스타작가 홍경택 씨를 비롯해 남경민 서상익 이동기 정수진 씨 5명의 그림 50여점이 걸렸다. 기존의 ‘화가의 아뜰리에’ 시리즈를 더 숙성시킨 남정민, 팝아트를 넘어 새로운 추상작업을 내놓은 이동기, 색채미학의 깊이를 추구한 홍경택, 거장들에 대한 오마주와 미술관을 둘러싼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서상익 씨의 작품이 눈길을 붙잡는다.

‘화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기획전 ‘예술가의 시대’전은 서울 삼성동 갤러리 인터알리아에 마련됐다. 참여 작가는 인쥔 인쿤 등 중극 작가들과 주태석 김태호 유선태 왕열 최석운 권지은 씨 등 국내 작가 40여명이다. 극도로 생략한 그림, 생각보다 훨씬 과장된 작품 등 다채로운 회화 작품이 총망라됐다.

90대 작가 백영수 씨의 회고전은 광주시립미술관과 무각사 로터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백씨는 1940~50년대 활동한 ‘신사실파’ 동인(김환기·유영국·백영수·이중섭·이규상·장욱진) 중 유일한 생존 화가. 지난해 프랑스에서 귀국, 의정부 작업실에서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모자(母子)’ 시리즈를 비롯해 1940~50년대 초기 작품, 2000년대 ‘여백’ 시리즈 등 105점을 출품했다.

현대는 사간동에서 박수근 장욱진과 오치균 씨 등이 참여하는 ‘나무가 있는 풍경’전을 통해 회화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달 30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에는 절대자의 의지를 받아 우뚝 서 있는 구도자처럼 나무의 원형질을 이미지화한 회화 30여점을 내놓았다.

선화랑은 ‘발달 장애 친구들과 함께하는 안윤모의 519일 그림여행’전을 열고 경쾌한 색감으로 화면을 채운 안씨의 근작 40여점을 소개한다. 국제갤러리는 일본 유코 시라이시의 색면 추상회화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내년 2월17일까지 열리는 문봉선 씨의 개인전에는 전통 필법으로 소나무를 그린 작품 50여점이 걸렸다. 이화익갤러리는 박상미 씨의 수묵 회화 20여점을 보여준다.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는 “디지털 문화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순수 회화 영역은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며 “국내외 미술품 경매에 나오는 그림들이 미디어 아트나 영상설치 작품보다 높은 가격에 팔린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