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엔高 끝내 버텨내지 못한 日기업
“몇몇 사람들은 일본이 농업국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예요.” 2009년 도쿄에서다. 다케모리 슘페이 게이오대 교수는 일본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제조업이 붕괴 위기를 맞았다며 이렇게 씁쓸해 했다. 잃어버린 10년을 간신히 버텨온 수출 주도형 산업구조가 미국발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 수요 감소에 엔고라는 핵폭탄을 만나 생산시설을 스크랩해야 하는 지경에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이튿날 만난 나카가와 마사하루 중의원의 근심 가득한 얼굴도 아직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조찬을 함께하던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힘 없이 내려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온종일 지역구를 둘러봤습니다. 앞이 안 보입디다. 답답할 뿐이네요.” 그의 지역구는 미에현. 샤프 혼다 등 일본을 대표하는 제조기업들의 핵심 공장이 줄지어 위치해 있는 곳이다. 첨단 공장들이 엔고 탓에 휴업과 감산을 거듭하고, 직원들에게 부업을 독려하는 지경이 됐으니 속이 편할리 없다. 그의 어두운 표정은 내내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당시에는 두 사람의 걱정이 일본인 특유의 엄살이려니 했다. 일본이 농업국가로 간다니 말이 되나. 그러나 불과 3년 만이다. 그들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 나카가와 의원이 가장 걱정하던 미에현의 샤프는 파산위기에 놓였고 파나소닉과 소니의 신용등급은 정크 수준으로 강등됐다. 다케모리 교수의 지적대로 일본의 제조업 자체가 붕괴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일본 제조업 위기의 출발점은 잃어버린 10년이다. 경쟁력 강화의 노력마저 잊어야 했던 고통의 10년이었다. 그러나 버블이 걷힐 무렵 미국의 호경기와 신흥국의 고성장이 맞물렸다. 수출에 불이 붙어 일본은 2002년부터 6년 연속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잃어버린 10년의 교훈을 잊고 기형적 해외수요 폭발과 엔저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시점이다.

곪은 상처를 터뜨린 것은 엔고였다.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신흥국에 대한 수출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른바 ‘초(超)엔고’가 겹친 것이다. 그 어렵다던 1990년대 중반의 엔고 때도 환율이 달러당 100엔 밑으로 떨어진 기간은 13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56개월째다. 그것도 줄곧 80엔대 아래다. 지속적인 구조조정 탓에 ‘마른 수건도 다시 짠다’는 일본 특유의 원가절감 방식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됐다. 모든 생산시설이 해외로 뛰쳐나갔다.

그 결과가 지난해 무역 적자다. 오일쇼크 이후 31년 만이다. 3~5년 뒤 무역적자 규모가 10조엔 규모로 불어나고, 2020년께는 경상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일본 스스로 국채를 소화하지 못해 외국인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 경제 몰락의 시나리오다.

문제는 일본도 이대로 망가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는 일본은행 윤전기를 쌩쌩 돌려서라도 무제한 금융완화에 나서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돈을 찍어 부채폭탄을 터뜨리겠다는 생각이 아무리 현실성이 없다 해도 일본의 정치상황은 경제만큼이나 녹록하지 않다. 총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하고, 일본은행이 아베의 공약을 수행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오바마 재선에 따른 달러화 약세 추세에 일본이 엔저로 맞불을 놓는다. 글로벌 환율전쟁의 시작이다.

걱정은 원화다. 원·달러 환율은 연중 고점에 비해 8.5% 떨어졌다. 원·엔 환율도 12.1%나 빠졌다.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에 이미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다.

어느 선진국도 환율을 시장의 자율에 맡기지 않는다며 소위 환율주권론을 내세운 것은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그의 고환율 정책이 대기업만 살찌운다는 비난이 적지 않았지만 기업 경쟁력 제고에 적지 않은 힘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글로벌 재정위기를 겪으면서도 그나마 내수가 버티고 일자리를 유지해온 배경이다.

정부가 아무 때나 시장에 뛰어들어 통화가치를 왜곡시켜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환율이 경제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채 과도한 변동으로 경제 안정을 위협하는 데도 정부가 그냥 방치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가 환율 안정을 위해 외국환 은행에 대한 선물환 포지션 비율을 낮추기로 했다. 추가적인 조치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도 글로벌 환율전쟁에 참전을 선언한 셈이다. 장기전이다. 단단한 대비가 필요하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