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다 보여줘도 되나요?”

세 시간째다. 공장 끝에서 끝까지 직선 거리로만 500m. 비슷한 규모의 공장 네 곳을 연거푸 돌았다. 밀가루 반죽처럼 동판을 녹인 뒤 가래떡 만들 듯 구리선을 뽑아내는 소재공장, 실을 뽑아 옷을 만드는 섬유공장과 공정이 비슷한 케이블 공장까지 둘러보는 강행군이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어 “영업비밀도 있을 텐데 공장을 모두 공개해도 되냐”고 돌려 말했다.

김윤수 대한전선 당진공장장(53·상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언제 이 공장에 다시 오겠냐”며 “보여줄 게 너무 많으니 오늘 끝을 보자”고 했다.

김 상무가 신이 난 이유는 있었다. 이곳은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전선 공장이다. 작년 10월 대한전선이 충남 당진시 고대면 일대 35만㎡ 부지에 이 공장을 완공할 때만 해도 비관론이 적지 않았다. 경쟁사들은 전선 종류별로 공장을 따로 세우는데 굳이 한데 모아둘 필요가 있냐는 논리다. 게다가 회사 재무상태가 좋지 않은 때 4000억원 가까운 돈을 들여 대규모 공장을 짓는 건 무모한 모험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1년 만에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김 상무는 “경기 안양 등에 흩어져 있던 공장을 이곳으로 모은 뒤 생산성을 40% 높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8㎜ 구리선으로 환산하면 안양 공장 시절엔 매일 253㎞ 구리선을 만든 데 비해 지금은 하루평균 358㎞를 생산한다. 매일 서울에서 대구 정도 가던 길이를 이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로 늘렸다는 게 김 상무의 설명이다.

그의 자랑이 절정에 달한 곳은 50층 높이의 대형 타워. 겉보기엔 전망대인데 이 타워의 기능은 따로 있다. 많은 전력을 한꺼번에 보낼 수 있는 초고압전선을 만드는 공장이다. 160.5m로 당진에서 가장 높을 뿐 아니라 세계 전선 타워 중에서도 으뜸이다.

김 상무는 “200도 이상 달군 구리선을 타워 끝까지 올린 뒤 내려오면서 식히고 절연체를 씌우려면 전선 타워가 높을수록 생산성이 높다”며 “그걸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초고압전선 생산 과정을 직접 보고 싶다”고 연신 부탁해도 김 상무는 이 초고압전선 공장만큼은 철저하게 보안에 부쳤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대한전선은 생산량으로 세계 7~8위권이지만 초고압전선 분야에선 ‘빅 5’ 안에 든다. 특히 당진으로 공장을 옮긴 뒤 더욱 탄력을 받았다. 올 상반기에 초고압전선에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4배 많은 2억달러 이상 수주하며 지난해 전체 수주액을 뛰어넘었다. 이달에도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1400만달러 공사를 따내며 승전보를 이어가고 있다.

덕분에 대한전선은 3분기까지 627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해외 투자 손실분을 제외한 순수 국내 기준이지만 작년보다 70%가량 늘었다.

김 상무는 “한눈 팔지 않고 좋은 제품 만드는 데만 몰두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제조업의 기본으로 돌아간 게 주효한 것 같다”고 했다.

회생의 빛이 보여도 대한전선은 아직 샴페인을 터뜨리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영업이익으로 금융이자를 갚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국내 1위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서기 위해 2008년 세계 최대 전선업체인 이탈리아 프리즈미안을 인수하려다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늘어난 차입금에 발목을 잡힌 탓이다. 유동성 부족으로 2008년엔 하나은행과 재무약정까지 맺었다. 남부터미널 부지와 안양 옛 공장터 등 수많은 부동산, 본업과 관계없는 자회사를 매각하고 유상증자를 통해 재무구조 개선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강희전 대한전선 사장은 “내년이면 국내외 연결 기준으로도 흑자를 내 진정한 턴어라운드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창사 60주년을 맞는 2015년엔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진=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