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계열사 임원 A씨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깨어난다. 새벽 6시30분 출근을 한 지 벌써 넉 달째다. 날이 추워지니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싫을 때가 적지 않다. 그는 “그래도 한 시간 이상 일찍 나와 밀린 일을 처리하고 곰곰이 혼자 이것저것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며 “무엇보다 이른 새벽부터 바쁘게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보면서 엄숙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고 했다. ‘아날로그 시대로의 회귀냐’ ‘피로도가 쌓이고 있다’는 등의 불만에도 새벽 출근은 삼성 임원들의 일상으로 굳어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실적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것과 달리 서울 서초동 본사에는 극도의 ‘절제’와 ‘긴장’의 분위기가 흐른다.

이른바 ‘조출족’의 대표 주자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다. 2000년 현대·기아차그룹 출범 이후 13년째 매일 아침 6시30분 출근 도장을 찍는다. 부친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몸에 밴 품성이다. 주요 경영진은 이보다 더 이른 시간에 서울 양재동 본사로 나와 글로벌 시장에서 밤사이 벌어진 현안을 미리 챙긴다. 현대차의 질주 비결을 탐구하는 학자들은 “정 회장과 경영진의 몸에 밴 극한의 긴장과 집중력이 만들어낸 성과”라고 입을 모은다.

‘극한 긴장’은 기업인의 숙명

금세기 최고의 명승부로 기업사에 남을 애플과의 ‘스마트 대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열정을 지닌 인재들의 헌신과 헝그리정신이 반전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자평한다. “우리 무선사업부 임원들이 1년에 20일을 채 못 쉰다는 말을 듣고 인사팀에 더 쉴 수 있도록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인사팀에서 뭐라고 하니까 휴일에는 부하 직원들의 출입카드를 들고 다닌다고 하네요. 임원들에게 물어보면 자존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벤처정신이 강점인 경쟁사 애플에선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생겨나고 있다니 아마 2, 3년 뒤엔 더 달라질 겁니다.”

철도차량 설계도를 들고 세계 시장을 찾아다니던 이민호 현대로템 사장이 지난 24일 유명(幽明)을 달리해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고인은 한국경제신문을 비롯한 26일자 주요 신문에 사진과 기사가 실린 충전식 배터리로 달리는 ‘무가선(無架線) 트램’에 열정을 쏟아 왔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행사가 된 지난 22일 충북 오성 철도기지창에서 열린 시승식에선 “실용화되지 않았지만 다음달 대만에서 있을 트램 입찰에 참여할 것”이라고 열정을 보였다.

건강검진 시간도 못 낸 CEO

지난 9월 말 독일 베를린 철도차량박람회에서 한경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선 “인도 터키 브라질 등 신흥시장에서의 강점을 바탕으로 불황을 극복할 자신이 있다”며 “로템을 ‘철도차량업계의 현대차’로 성장시킬 것”이라는 꿈과 포부를 들려줬다. 고인은 한 달에도 두세 번씩 해외 출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0년부터 현대로템을 이끌며 인도 터키 브라질 우크라이나 등 신흥시장을 개척하고 일감 수주에 공을 들여왔다. 1년에 한 번 있는 정기 건강검진을 틈을 내지 못해 연말로 미뤄 놓았다가 지난 주말 아침 산책길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변을 당했다. 조문객들은 한창 일할 고인의 나이(59세)를 아쉬워하며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말을 많이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창조와 혁신을 이뤄내려는 도전 의식인 기업가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걱정이 많지만, 고단한 기업인들의 헌신과 열정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다. 양자대결 구도로 좁혀져 본격 유세전에 들어서는 대선판에서 기업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 만한 비수 같은 언어들이 좀 덜 나왔으면 좋겠다.

유근석 산업부장 y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