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최고경영자(CEO) 교체, 주요 제품의 시장점유율 하락, 번번이 실패하는 인수·합병(M&A)….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실리콘밸리 대표 기업 휴렛팩커드(HP)가 또다시 업계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지난해 8월 111억달러를 들여 인수한 영국 소프트웨어업체 오토노미를 실제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게 주고 산 사실이 내부 감사 결과 드러난 것.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HP 주가는 20일(현지시간) 12%나 급락했다.

○88억달러 손실처리

HP는 이날 68억5400만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한 4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손실이 컸던 것은 과도하게 평가됐던 오토노미 영업권 및 무형자산(소프트웨어) 가치를 바로잡으면서 88억달러를 손실 처리했기 때문이라고 HP는 설명했다.

메그 휘트먼 CEO는 “회계법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와 함께 내부 조사를 벌인 결과 심각한 회계부정과 노골적인 허위공시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면서 “매출과 수익을 부풀리기 위한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오토노미의 창업자이자 매각 당시 CEO를 맡고 있던 마이클 린치는 “부적절한 회계는 없었으며 HP가 자신들의 부실 경영을 숨기기 위해 일을 꾸며냈다”고 강력 반발했다.

○HP 위기는 리더십 위기

오토노미를 인수한 것은 HP를 컴퓨터와 프린터를 만드는 하드웨어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바꾸려던 레오 아포테커 전 CEO의 야심찬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인수 당시부터 111억달러는 너무 비싸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휘트먼 CEO도 M&A 실패를 아포테커 전 CEO의 탓으로 돌렸다.

HP가 잘못된 M&A로 곤욕을 치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 140억달러에 산 일렉트로닉테이터시스템(EDS)과 2010년 17억달러에 사들인 스마트폰 제조업체 팜 모두 실패한 M&A로 기록됐다.

이 과정에는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불명예 퇴진한 CEO들이 있었다. 칼리 피오리나 전 CEO는 주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컴팩을 인수했다가 재임 기간 HP 주가를 63% 하락시킨 채 2005년 불명예퇴진했다.

2006년 영입된 마크 허드는 EDS와 팜 인수를 주도한 인물. 그는 비용절감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연구·개발(R&D) 투자를 게을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허드 전 CEO는 2010년 협력사 직원과의 성추문으로 물러났다.

그의 후임으로 등판한 아포테커 CEO도 PC사업부 분사, 오토노미 인수 등을 통해 HP의 변신을 꾀하다 지난해 이사회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았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