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금 두 배 더 받아 드릴게요. 언제든지 상담 환영합니다.” 지난 15일 오후 1시25분, 서울 신촌동 신촌세브란스병원 본관 9층 중환자실 병동. 교통사고나 질병 등으로 생명이 위독한 환자의 보호자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에서 남색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30대 초반의 한 남성이 열심히 명함을 돌리고 있었다. 10여분이 지나자 또 다른 40대 중반의 남자가 자신을 노무사라고 소개한 뒤 “산업재해보험 관련 무료로 상담해 드립니다”라며 조그만 책자를 가족들에게 일일이 나눠줬다. 대기실에 있는 환자 보호자들은 가족이 위독한 상황에 처해있어 경황이 없는 듯 보였지만 일부는 보험금을 더 받아 주겠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즉석에서 상담을 받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 취재팀이 이날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두 시간 동안 가족 대기실을 지켜본 결과 11명이 자신을 법무법인 사무장 또는 노무사, 손해사정사라고 소개하며 “보험금을 더 받아 드릴 테니 연락을 달라”고 명함을 건네고 있었다. 서울 흑석동 중앙대병원 중앙동 13층 입원 병동의 상황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두 달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최준용 씨(66)는 “하루에도 이런 사람들이 몇 명씩 왔다 간다”며 침대 옆에 수북이 쌓인 명함들을 꺼내 보여줬다.

병원 입원실이나 중환자실을 돌아다니며 보험금을 더 받아 주겠다고 환자들을 유혹, 높은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무자격 브로커들이 환자와 보호자들을 멍들게 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손해사정사나 법무법인 사무장을 사칭, 보험금 산출 업무를 대행하거나 보험금 합의를 대신 해주고 많게는 보험금의 40%를 가로채고 있다. 수백만원의 착수금을 미리 받고 자취를 감추는 사기꾼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실제 보험금 산출 등의 업무를 대신할 수 없는 무자격 브로커라는 것. 이들이 손해사정 업무를 진행할 경우 보험업법 202조 위반으로 3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김명규 한국손해사정사회 사무총장은 “병원을 돌아다니며 명함을 돌리는 이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가짜 브로커’”라며 “일단 계약을 하면 브로커가 모든 손해사정이나 산재 승인 신청 업무를 처리하는데 경험이 적고 일이 서툴러 환자들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브로커만 2000여명…보험금의 30% 챙겨

한국손해사정사회에 따르면 병원 입원실을 돌아다니며 브로커로 활동하는 이들은 2000여명으로 추정됐다. 이들은 병원을 직접 돌아다니며 고객을 확보하는 ‘영업 사무장’으로 통한다. 기자는 서울 H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의 아내 최명자 씨(44)에게 명함을 준 브로커에게 손해사정업무를 맡길 것처럼 접근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씨의 남편은 최근 교통사고로 척추가 부러져 하반신이 마비됐다.

자신을 J법무법인 사무장이라고 소개한 이모씨는 최씨 남편의 현재 상태를 들은 뒤 다짜고짜 “자신이 아는 의사가 있으니 안양의 S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권했다. 척추분야에 권위가 있는 교수의사이고, 특진비 등을 10% 할인해 줄 수 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17년 경력의 손해사정사 이정웅 씨는 “친분이 있는 의사를 통해 보험금을 타기에 유리한 진단서를 끊어내고, 자신은 환자를 데려간 대가로 병원에서 리베이트를 받는 구조”라고 귀띔했다.

이씨의 뒤이은 발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A공제회(가해자가 가입한 보험회사)라면 제가 센터장이든 차장이든 친분이 있는 관계자들이 많으니 한번 잘 만들어 봅시다.” 친분을 이용해 진단서를 끊고 원래 받을 수 있는 보험금보다 더 받도록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이 손해사정사는 이에 대해 “브로커들은 보험회사 직원들과 친분을 과시하며 보상금을 최대한 많이 받아 줄 수 있다고 유혹한다”며 “이들 가운데는 실제 보험회사 보상담당과 결탁해 자신이 받은 수수료를 보험회사 직원과 나누기도 한다”고 말했다. 보험 가입자의 보험금이 브로커와 보험회사 직원들에게 엉뚱하게 새나가기도 한다는 얘기다.

브로커 이씨는 또 “환자의 상태를 보면 2억~3억원은 받을 수 있는데, 무조건 최고액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씨가 제안한 수수료는 30%. 만약 환자가 3억원의 보험금을 타낸다면 9000만원을 떼가는 셈이다. 기자가 J법무법인에 확인 결과, 브로커 이씨는 직원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손해사정사들은 통상 10%의 수수료를 받는다.

◆브로커만 믿었다 보상금 못 받고 빚만 쌓여

보험금을 타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건 그나마 양심적이다. 손해사정이나 산업재해 승인 신청 업무를 일임한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이 아예 보험금도 만져보지 못하는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고액의 보험금을 받아주겠다며 환자와 계약을 하지만 무자격 브로커들의 업무 경험이 적어 오히려 보험금 자체를 받지 못하는 피해 사례가 점차 늘고 있는 것.

장순자 씨(51)도 지난해 법무법인 사무장을 사칭한 허모씨에게 일을 맡겼지만 결국 착수금 800만원만 날렸다. 장씨의 남편은 회사 업무 중에 심장마비로 인해 식물인간이 됐다. 장씨는 병원에서 명함을 돌리며 접근한 허모씨를 만났다. 장씨는 “변호사가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겠다고 했지만, 변호사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씨는 착수금도 법무법인 명의의 통장 대신 자신의 개인통장에 입금할 것을 요구했다. 두 차례에 걸쳐 산재 불승인 통보를 받자 허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으니 걱정말라”며 소송을 미뤘다. 결국 행정소송을 할 수 있는 시일도 지나버렸다. 장씨는 한 달에 250만원이 넘는 병원비를 혼자 감당하고 있다. 현재 허씨는 장씨와 연락도 닿지 않는 상황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산재 보험 승인 절차를 대신하는 것은 변호사나 노무사만 할 수 있다”며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왔다고 말해도 변호사가 실제로 업무를 처리하지도 않고, 돈도 개인 통장으로 받은 정황이 있다면 이는 변호사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병원, 경고문 붙여…금감원 실체 파악도 못해

금감원에 따르면 보험분규 민원은 2009년 3만1544건에서 지난해 3만9889건으로 26% 증가했는데 보험금 산정 관련 내용은 같은 기간 3307건에서 6328건으로 91% 급증했다.

일부 병원들은 임시방편으로 브로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환자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고 환자 빼내기도 빈번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서울 역촌동 참사랑병원처럼 원내 곳곳에 ‘환자의 치유 및 안정을 위해 변호사, 노무사, 손해사정인 등 허가 없이 방문, 상담, 유치시 변호사법 35조에 의거해 형사 고발 조치하겠습니다’라는 경고문을 붙인 병원도 있다. 병원 관계자는 “대학병원들도 이런 사례가 빈번해 브로커 출입을 막고 있지만 워낙 외부인 출입이 많아 막아내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손해사정업계는 손해사정사를 사칭하는 브로커가 늘어나면서 손해사정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며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손해사정사회는 앞으로 손해사정사나 손해사정사를 돕는 보조인의 신고를 의무화하고, 이들의 명단을 홈페이지 등에 게재할 방침이다. 손해사정사회는 보조인 등의 정확한 수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손해사정사회 측은 “손해사정사나 노무사들은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영업하지 않는다”며 “입원실에서 명함을 돌리는 이들은 무조건 의심해봐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이를 단속해야 할 금융감독원은 실태파악조자 못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피해사례를 접수한 바가 없다”며 “만약 손해사정사나 노무사를 사칭하는 경우가 있다면 진상 조사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김우섭/이지훈/박상익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