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존속살인이 대기업 탓이라는 일본
존속살인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대기업 탓이다. 웬 뚱딴지 같은 이야기냐고 하겠다. 하지만 일본의 한 장관이 몇 해 전 공개석상에서 내놓고 한 발언이다. 대기업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으면서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얘기다.

당시 금융·우정개혁 장관이었던 가메이 시즈카 중의원은 자신이 재계 단체 게이단렌(經團連) 수장인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을 만나 이렇게 면박을 줬다고 흐뭇해했다. 미타라이 회장은 그게 어디 기업의 책임이냐고 항변했지만, 가메이는 대기업이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호주머니까지 털어 돈을 벌지 않았느냐며 더 창피를 줬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참으로 고약한 정치인이다.

가메이 장관의 발언이 파장을 불러일으키자 재계가 발끈했다. 하지만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가메이의 사과를 이끌어내기는커녕 미타라이를 행정쇄신위원회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국가예산 낭비요소 제거 등에 대한 결정권을 지닌 최고 자문기구다. 게이단렌 회장을 아예 정부의 경제협력 파트너에서 배제시켜 버린 것이다.

캐논 회장이기도 한 미타라이는 미국에서 23년이나 근무한 전문경영인이다. 그만큼 일본의 기업 규제에 심한 염증을 느꼈을 것이다. 누구보다 앞장서 감세와 규제 완화를 주장한 재계 수장이다. 게이단렌이 ‘정치헌금’을 모으고 배분하던 관례까지 폐지시켰으니 정치권에는 당연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사실 가메이의 기업관은 일본 정치권 전반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대기업은 온갖 특혜 속에서 성장한, 그저 정치자금의 공급원이다. 마구잡이식으로 세금을 물리고, 규제를 가해도 괜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다 한들, 매에는 장사가 없다.

100년 기업 샤프가 파산 위기에 몰렸다. 언론들이 경영학자들의 입을 빌려 샤프 몰락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았다. 고립된 제품개발 전략이 화를 불렀다는 ‘갈라파고스화’, 안에만 틀어박히려 한다는 ‘우치무키 현상’, 잃은 시장에 끝까지 미련을 둔다는 ‘갬블러 성향’ 등 용어도 다양하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다.

몇 달 전까지 샤프 회장을 지낸 마치다 가쓰히코 상담역은 몰락의 이유를 밖에서 찾고 있다. 이른바 ‘6중고’다. 엔고와 높은 법인세, 무역자유화의 지연, 노동 규제, 온실가스 규제, 전력 부족 등이 일본 기업을 벼랑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위기에 몰려 쏟아내는 변명이 아니다. 6중고라는 용어 자체가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아키오 사장이 만들어낸 조어이기 때문이다. 기업 경쟁력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정치권의 막무가내식 정책이 6중고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이 올해 법인세율을 낮췄다지만 실효세율은 35.64%다.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심각한 재정적자 탓에 추가 인하는 꿈도 꾸지 못한다. 고용은 갈수록 경직화되고 있다. 단기파견이 전면 금지됐고, 제조업 파견금지도 논의 중이다. 한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초강수의 온실가스 규제는 이미 산업의 구조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무턱댄 원전 가동중단에 기업은 기진맥진이다. 도무지 버텨낼 방법이 없다.

일본식 종신고용의 최후 보루라는 칭송을 들어온 샤프는 당장 8000명의 종업원을 내쫓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전체의 14%다. 1만2000개 협력업체와 67만명의 협력사 종업원은 이제 하늘만 쳐다볼 뿐이다. 샤프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그 화려했던 일본의 거인들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 정치가 경제를 망가뜨리고, 기업과 근로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나라가 바로 지금의 일본이다.

일본상공회의소 오카무라 다다시 회장 등 경제계를 대표하는 인사 6명은 최근 기자회견을 갖고,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긴급제언을 했다. 정치가 이대로 가다간 일본 경제는 침몰하고 말 것이라는 하소연이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조기총선 국면에 빠져 여전히 물고 물리는 난투극에 몰두할 뿐이다. 일부만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환호성을 지를 뿐이다. 누가 정권을 잡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게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다.

일본 기업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우리 정치가 갈수록 일본을 따라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벌써 그런 지적이 외신에 떠돌고 있다. 일본이고, 한국이고,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