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황혼이혼이란 말까지 심심찮게 들려온다. 부부의 문제 이전에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경박한 풍조 때문일 것이다. 《퇴계집(退溪集)》에는 이런 세태에 꼭 읽어보라고 권할 만한 편지 한 통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이 어린 제자 이함형(1550~1586)에게 보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있고 난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고 난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고 난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고 난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고 난 뒤에 예의를 베풀 곳이 있다”고 했네. (…) 부부의 도리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니, 마음이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홀하고 박절하게 대해서야 되겠는가.’

퇴계는 아내의 성품이 나빠 소박을 당할 만한 죄를 지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부의 연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내의 성품이 나빠 고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아내의 얼굴이 못생기고 우둔한 경우도 있고, 남편이 방종하여 행실이 좋지 못한 경우도 있고, 남편의 호오(好惡)가 괴상한 경우도 있네. 대의로 말한다면 그중 아내가 소박을 당할 만한 죄를 지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편이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고 애써 아내를 잘 대해주어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않으면 되네.’

퇴계는 자기의 불행한 과거사까지 털어놓는다.‘나는 두 번 장가들었는데 하나같이 아주 불행한 경우를 만났네. 그렇지만 이런 처지에서도 감히 박절한 마음을 내지 않고 애써 아내를 잘 대해준 것이 거의 수십 년이었네. 그동안에 마음이 몹시 괴로워 번민을 견디기 어려운 적도 있었네. (…) 공은 반복해 깊이 생각하여 잘못을 고쳐야 할 걸세. 이런 잘못을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학문은 어떻게 하겠으며, 행실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함형은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서울 사람인데 처가가 있는 순천에 내려가서 살다가 1569년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갔으니, 스승을 모신 기간이 매우 짧았다. 그는 간재 이덕홍과 함께 《심경(心經)》《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관해 제자들이 묻고 퇴계가 답한 것을 모아 《심경석의(心經釋義)》와 《주자서강록(朱子書講錄)》을 펴냈다. 실로 독실한 제자였다. 이 편지를 보낼 때 퇴계는 70세, 이함형은 21세였다. 그리고 이 해에 퇴계는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자기의 불행한 과거사도 털어놓는다. 퇴계는 21세에 진사 허찬의 딸과 혼인해 금슬이 좋았으나 27세에 상처하고 말았다. 그리고 30세에 봉사 권질의 딸과 두 번째 혼인을 했다. 이 권씨 부인의 조부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사사(賜死)되고, 부친 권질도 그 일로 거제도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녀는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권질은 중종반정 이후 복권됐으나 기묘사화 때 다시 집안이 화를 당해 숙부는 사사되고 숙모는 관노가 되며 권질은 퇴계의 고향인 예안으로 귀양간다. 거듭되는 집안의 참화를 겪으면서 권씨 부인은 심한 충격을 받아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한다. 퇴계가 예안으로 귀양온 권질을 찾아갔을 때, 권질이 퇴계의 인품을 믿고 딸을 부탁했다고 한다.

권씨 부인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들이 전해진다. 퇴계가 조정에 급히 입고 나갈 도포를 빨간 헝겊으로 기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퇴계의 배필로는 많이 모자라는 여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퇴계는 1546년 권씨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부부의 도리를 다했다.

조선시대에 부부간의 불행한 과거사를 털어놓는 것은 친구 간에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49세나 어린 제자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얘기하면서 부부간의 도리를 다하라고 타이른 것을 보면 퇴계의 인품이 얼마나 너그럽고도 진솔했으며 제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다. 이 편지를 읽고 이함형은 잘못을 고쳐 다시 부부 사이가 좋아졌고 소박맞을 뻔한 이함형의 부인은 퇴계의 은혜에 감사하여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3년을 살았다고 하니, 이 또한 오늘날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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