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공중파 방송에서 여대생 출연자가 “키 180㎝가 안 되는 남자들은 루저(낙오자)”라고 말해 난리가 났다. 해당 프로그램 홈페이지에는 ‘방송이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나’ ‘인격모독’ 같은 항의 글로 도배됐고,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는 소송이 잇따랐다. 프로그램 제작진 일부가 교체됐는가 하면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를 ‘탐 크루저’로, 영국 축구선수 웨인 루니를 ‘웨인 루저’로 불러야 하느냐는 패러디도 유행했다.

큰 키를 선호하는 건 요즘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미 수렵어로시대부터 그랬다는 설도 있다. 키가 커야 사냥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사냥으로 밥벌이를 하지는 않지만 큰 키가 여전히 사회생활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미 프린스턴대 앵거스 디톤 교수 연구팀이 18세 이상 남녀 45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키 큰 사람이 작은 사람보다 삶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이고 삶의 만족도 역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저런 모임과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많아지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능력이 자연스레 길러지는 덕이라고 한다.

물론 반론도 있다. 미국의 경영자문가 토머스 사마라스는《키의 진실》이란 저서에서 작은 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장기적으로 인류에 해를 끼칠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키가 클수록 식량을 더 많이 소비하는 데다 집단 체중 증가를 불러올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얘기다. 키 작은 이들이 사회적 편견 극복을 위해 더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설도 나온 지 오래다. 나폴레옹을 비롯 덩샤오핑, 피카소, 조용필 등 각 분야에 ‘작은 거인’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 키우는 부모 입장에선 편견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나라 성장기 아동 10명 중 3명이 키를 키우려고 인위적 성장관리를 한다는 게 서울 상계백병원 성장클리닉 조사다. 성장호르몬 치료를 받는 경우는 3%에 못 미치고 대부분 성장 촉진 한약이나 성장보조약을 먹는다고 한다. 어제 공정거래위원회가 고가로 판매되는 키 성장제에 소비자 피해주의보를 내렸다. 상당수 제품이 일반식품이나 건강기능식품에 불과한 데다 객관적 효과 검증도 없이 공급가 대비 최고 50배로 판매된다는 경고다.

키는 사춘기가 끝나기 전 매년 4㎝ 미만으로 자라거나 성장 속도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경우 치료를 검토할 만하단다. 성장호르몬 부족, 일부 성장판 손상 등의 요인이 있을 때 뚜렷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특징이 다른 터에 너나없이 ‘얼마 이상’으로 키를 키우려는 것은 억지다. 출처 모호한 약을 비싸게 사먹여 봐야 효과도 없이 아이들에게 부담만 주게 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