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의 내년 생산량이 예상보다 줄어들 전망이다. 30년을 끌어온 업계의 치킨게임(상대가 타격을 입을 때까지 밀어붙이는 무한경쟁)이 마무리됐고, 수요 부진 탓에 업계가 투자를 축소하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내년 메모리 값이 점진적으로 오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29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경영진을 상대로 설문한 결과 내년 D램과 낸드의 비트그로스(bit growth)는 올해의 절반 수준인 각각 20%, 40% 이하에 그칠 것으로 파악됐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업체들이 투자를 줄이고 있고, 미세공정 기술도 개발이 쉽지 않다”며 “내년 비트그로스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10년간 비트그로스는 낸드 40~200%대, D램은 20~80%대를 보여왔다. 가트너, 아이서플라이 등 시장조사업체는 올해 비트그로스를 D램 40%, 낸드 60%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내년엔 D램 30%대, 낸드 50~60%대로 예측하고 있다.

비트그로스 증가 요인은 △생산설비 확대 △공정기술 발달 등 크게 두 가지다. 칩 생산개수가 늘거나 나노기술 발달로 집적도가 높아지면 증가한다. 업계가 내년 비트그로스를 낮게 보는 이유는 이들 두 가지 요인이 모두 크게 진전되기 어려워서다.

권오철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 25일 ‘반도체의 날’ 행사에서 “그동안 시황이 어려워 업체들이 투자를 줄이고 일부 해외업체는 기술 개선이 더뎌 내년에 공급량 조정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전동수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은 “D램 3개, 낸드 4개로 제조사가 정리돼 치킨게임이 끝났다”며 “공급과잉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생산설비는 실제 감소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낸드와 D램을 만들던 기흥의 9라인, 14라인을 시스템반도체 라인으로 돌렸고 미국 오스틴의 낸드 라인도 시스템반도체로 바꾸고 있다. 중국 시안에 낸드 라인을 짓고 있으나 내년 말에나 완공한다.

신규 투자도 활발하지 않다. 업계가 치킨게임을 벌일 이유가 없어진 데다 수요 부진으로 메모리 값이 떨어져 투자 유인이 감소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6월 완공한 청주 M12라인에 절반만 설비를 채웠다. 이 회사는 지난 24일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내년 D램 캐파 확장 계획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미국 마이크론은 일본 엘피다 인수 작업으로 당분간 투자가 힘들다.

공정기술도 진전이 더디다. 업계는 D램 기준으로 20나노 초반 기술을 개발해 왔지만 벽에 부딪혀 있다. 서원석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가 D램 28나노 공정에서 바로 22나노로 가지 못해 중간 단계인 25나노로 가기로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생산기술이 10나노가량 발전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30% 이상 증산효과가 생긴다.

메모리 수요는 통상 매년 40%가량 늘어난다. 비트그로스가 여기에 못 미치면 내년 반도체 값은 올해보다 올라갈 전망이다. 서 애널리스트는 “불황 탓에 수요가 크게 증가하진 않겠지만 공급이 20~40% 늘어나는 데 그칠 경우 반도체 값은 안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비트그로스

bit growth. 비트(bit) 단위로 환산한 반도체의 생산량 증가율. 칩 생산개수뿐 아니라 공정기술 발달로 늘어나는 용량까지 감안한 것으로 실질적 D램 생산량을 나타내는 지표다.

김현석/정인설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