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중략)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모란이 피기까지는·1934). 시인 김영랑(본명 김윤식)은 알고 있었을까. 그의 삶이 모란을 닮았다는 것을.

190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김영랑의 집안은 부유했다. 대지주였다. 서울 휘문의숙(현 휘문고)을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뒤 당대 최고 무용수 최승희와 염문도 뿌렸다. 의식있는 청년이기도 했다. 3·1운동에 참여, 독립선언문을 구두 속에 숨겼다가 옥고도 치렀다.

그를 문단으로 이끈 건 친구 박용철 시인이었다. 영랑의 시에 매료된 박용철은 1930년 사재를 털어 ‘시문학’을 발간, 벗의 시 13편을 담았다. 두 달 뒤에 나온 2호에도 9편을 실었다. 바야흐로 한국 시문단은 ‘김영랑의 시대’였다. 문학 애호가들은 카프(조선사회주의예술가동맹)와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은 그의 순수문학에 열광했다.

광복을 앞두고선 ‘바다로 가자’ 등 저항시도 잇달아 내놨다. 광복 뒤엔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12세에 첫 결혼, 1년 만에 사별, 최승희와의 염문, 22세에 재혼, 시문단 스타 부상, 국회의원 출마, 공보처 출판국장까지 그의 길지 않은 삶 47년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모란 같았다. 6·25전쟁 중 서울 길거리에서 포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62년 전 오늘이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