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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자칼럼] 소돔의 1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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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구텐베르크가 1445년 금속활자를 발명했을 때 교황청은 “이제 일반인들도 글로 써진 음란한 얘기를 읽게 될 것”이라고 크게 우려했다고 한다. 이 우려는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활자로 된 첫 작품은 성경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처럼 성(性) 풍속을 다룬 책이 출간돼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술이 서양에 급속도로 퍼지게 된 동인이 외설서적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후 서양에서 음란서적 논쟁은 지속돼 왔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당대에는 논란이 많았다. 10대의 사랑과 폭력, 자살 등을 노골적으로 다뤘다는 이유로 연극무대에 오르지도 못할 뻔했다. 교황청은 1559년부터 금서목록을 발표하면서 음란을 이유로 많은 작품들을 금서로 정했다. 18세기 들어 카사노바의 ‘회상록’과 마담 드 스탈의 ‘코린느’ 등이 대표적이다. 19세기엔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사랑’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등이 재판에 회부됐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음란한 몇몇 구절을 빼야 출판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헨리 밀러는 파리에서 방랑생활하면서 겪은 성적 체험을 묘사한 ‘북회귀선’을 출간하자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한국 역사에서 외설작품 논쟁의 시발은 1954년 출간된 정비석의 ‘자유부인’이지만 최초로 법정에 회부된 작품은 1969년 염재만의 소설 ‘반노’다. 남편이 아내의 헛된 성적 애욕을 견디지 못하고 그 곁을 떠난다는 줄거리다. 작가는 1심에서 벌금 3만원형을 받았지만 이에 불복, 항소해 7년 만에 무죄판결을 얻어냈다. 마광수 교수는 1992년 소설 ‘즐거운 사라’로 구속되기도 했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최근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르키 드 사드(1740~1814)의 소설 ‘소돔의 120일’ 번역본을 음란하다는 이유로 배포 중지와 즉시 수거 결정을 내렸다. 근친상간, 수간(獸姦), 시간(屍姦) 등 음란성과 선정성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 위원회의 판단이다. 출판사 측은 “명작 반열에 드는 작품에 대한 판금을 이해할 수 없다”며 소송을 불사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사드는 가학성 변태성욕, 즉 ‘사디즘’을 낳게 한 프랑스 작가다. 루이 14세 때 권력자들이 젊은 남녀 노예를 이끌고 120일간 향락을 벌인다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2000년 국내에 출판됐을 때도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유통이 금지됐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음란성 기준은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공동체의 공통된 양심을 훼손하는가’라고 한다. 국내에서 소송이 벌어진다면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주목된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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