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자식 사랑이야 모든 부모가 똑같겠지만 나의 자식 사랑 방식은 다소 특이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내 교육관 중 하나는 “대학을 안 보내더라도 군대는 꼭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군대에서 남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사회에 나와서도 사랑받지 못한다. 군대에서 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사회에서도 제대로 일하는 법을 배우기 힘들다. 이는 내 평소 생각이자 자식 교육관의 핵심이다.

이 영향 때문인지 큰 아들은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 복무를 마쳤고, 몸이 약했던 둘째 아들도 최전방 부대에서 무사히 복무를 끝냈다. 두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잔소리가 필요 없는 듬직한 사내 몫을 해 주고 있어 여간 믿음직스러운 게 아니다. 아비의 충고대로 군 복무 중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노력에 대해 인정받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나는 1980년 증평 37사단 포병부대에 입대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진 직후였다. 군대 분위기도 엄격했다. 내가 배속된 본부 중대는 다른 중대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엘리트 의식이 강했던 곳이라 군기가 더 셌다.

군필자 중에선 ‘너 군대 체질이네’라는 칭찬을 들었던 이들이 꽤 있으리라. 그런데 나처럼 이등병 시절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위해 군의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근무해 보자는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남들이 이를 미리 알고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칭찬과 격려는 나의 열정을 일깨웠다. 매일 몇 킬로미터씩 군장을 매고 달리는 완전군장 구보도 체력 증진을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어하는 전우들을 챙겨주니 부대 분위기도 좋아졌다. 기합까지도 열심히 받았다. 고참과 지휘관들은 애정을 가지고 인정해 줬고, 다시금 내게 자신감이 되어 돌아왔다.

진정한 마음은 거대한 바위도 녹인다는 옛말이 있다. 내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군 시절 추억은 포병단장이었던 부대장님과의 일화다.

우리 포병단을 이끌었던 부대장님은 평소 온화하지만 카리스마를 갖춘 분이었다. 나는 그 분을 인간적으로 존경했고 개인적인 대화도 많이 나눴다. 하루는 야전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던 단장님이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했다. 아무 말없이 열심히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잠시 후 단장님은 기분 나쁘거나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제 아버님이라고 생각하고, 피곤하실까 걱정되어 주물러드린 것’이라고 속 마음을 말씀드렸다.

몇 주 후 단장님은 문뜩 “너희 집이나 구경가자”며 증평 부대에서 천안의 집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단장님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리며 걱정 마시라고 말해주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었다. 평소 복무 태도에서 내 충심을 읽었던 것 같다.

군대는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그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조직이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금융업계와 비슷하다. 금융업도 군대와 마찬가지로 매일 전투에 임하는 정신으로 일을 해야 하고,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신한금융투자의 리더로서 나는 직원들에게 강한 트레이닝과 집중력으로 프로가 돼라고 요구한다. 회사 슬로건도 ‘프로들의 자산관리’다. 자기계발과 노력을 통해 1등을 지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프로가 될 수 있다. 1등을 지향하며 무슨 일에든 최선을 다하면, 리더는 그들을 인정하게 되고 그 결과는 다시금 자신감이 되어 스스로에게 돌아간다. 나의 꿈은 많은 직원들을 프로로 키워내 회사에 기여하고, 사회에도 공헌을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군에서 큰 교훈을 주신 선임들을 생각한다. 지금은 연락이 끊겨버린 당시 부대장님을 비롯한 군대 선배들을 꼭 한번 뵙고 싶다. ‘나의 병영 이야기’를 통해 다시 연락이 된다면, 젊은 시절 내게 많은 배움을 주셨던 그분들께 큰절이라도 한 번 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