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에 활약한 역관 홍순언(洪純彦·1530~1598)을 아시는지. 역관은 요즈음의 외교관이나 통역사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을 두고 역관을 양성했다. 사역원에서는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배웠다. 사역원의 연혁과 주요 역관의 행적을 기록한 책도 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사역원의 연혁과 관제(官制), 고사(故事), 사대교린(事大交鄰)에 관한 외교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 《통문관지》에는 ‘인물’이란 항목을 설정해 최세진 홍순언 김근행 등 역대의 주요 역관들을 서술하고 있다. 다음은 홍순언의 행적이다.

‘홍순언은 젊어서 불우했으나 의기(義氣)가 있었다. 일찍이 연경에 가다가 통주(通州)에 이르러 밤에 청루(靑樓)에서 노닐다가 자색이 매우 뛰어난 한 여자를 보고 즐거워했다. 주인 할미에게 부탁해 접대하게 했는데, 그가 소복을 입은 것을 보고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제 부모는 본디 절강 사람으로서 명나라 연경에서 벼슬살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동시에 모두 돌아가셨는데, 관이 객관에 있습니다. 저 혼자서 고향으로 모셔가 장사지내고자 하나 장사지낼 밑천이 없으므로 마지못해 스스로 몸을 팝니다.” 말을 마치자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므로, 공이 듣고 불쌍히 여겨 그 장례비를 물으니 3백 금이 필요하다 하기에 곧 전대를 털어서 주고 끝내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홍순언이 도와준 이 여자는 뒤에 명나라의 정권 실세 석성(石星)의 첩이 됐다.

‘여자는 뒤에 예부 시랑 석성의 계실(繼室)이 됐는데, 시랑은 이 일을 들어서 알고는 그의 의리를 높이 여겨 우리나라의 사신을 볼 때마다 반드시 홍 통관이 왔는지 물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때문에 전후 10여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하고 있었다. 만력 갑신년(1584년)에 공이 변무사(辨誣使) 지천 황정욱을 따라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 밖을 바라보니 화려한 장막이 구름에 닿을 듯한데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 판사를 찾으며 말하기를, “예부 시랑 석성이 공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하러 나왔습니다”고 했다. 이윽고 계집종 10여명이 떼를 지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공이 놀라 피하려 하니, 시랑은 이렇게 말했다. “군(君)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내가 부인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인데, 이제야 다행히 서로 만나니 내 마음이 크게 위안됩니다.”’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파병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임진년에 왜노들이 국내로 침입하자 임금이 서쪽으로 피하고 중국에 구원을 청했다. 그때 중국 조정의 의논이 어떤 이는 압록강을 굳게 지키면서 형세가 변해가는 것을 보자고 청했고, 어떤 이는 이적(夷狄)이 서로 치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구원할 것까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석공이 그때 병부 상서로서 구원할 것을 혼자 힘써 말하고, 또 먼저 군기와 화약을 줄 것을 청했으니, 우리 동방이 나라를 회복해 어육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석공의 힘이다.’

조선시대 역관은 추천에 의해 심사를 받고 적격자로 판정을 받으면 사역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외국어 학습을 했다. 사역원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온종일 공부를 하고 매월 2일과 26일에는 시험을 쳤다. 3개월에 한 번씩은 지금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원시(院試)를 쳤다. 수련 과정을 거친 후에는 잡과(雜科)를 치렀다. 문과처럼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잡과에서 역관은 역과에 응시했고, 역과의 초시와 복시에 모두 통과해야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역관이 조선시대 일선 외교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에는 탄탄한 교육과정과 시험 제도가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외국어 학습을 실시하고 우수한 역관을 배출하는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홍순언과 같은 스타 역관을 배출할 수 있었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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