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서울 용산 방위사업청 건물에는 국방 연구·개발(R&D) 분야의 민·관 전문가 50여명이 모였다. 이날 행사는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 이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이 스트롱코리아로 나가기 위해 군(軍)과 민(民)이 국방 R&D 분야에서 어떻게 협력할지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국방 R&D는 흔히 무기 개발로 생각되기 쉽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기초기술 발전과 연관을 맺고 있다. 개인용컴퓨터(PC)나 인터넷, 위성항법시스템(GPS) 등 미국 실리콘밸리 발전의 토대가 된 기술 상당수가 군사 기술에서 비롯됐다.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 민·군이 협력해야 하는 이유다. 범부처들이 모여 만든 한국식 민·군 R&D 발전 모델을 발표하는 이날 행사가 주목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날 방사청과 지식경제부 등의 대책을 접한 민간 전문가들은 큰 아쉬움을 나타냈다. 선언적인 협력을 강조하는 기존 논의 수준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해서다. 알맹이 없는 발표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답답하다는 듯 자체적인 제안을 쏟아냈다. 한 국가출연연구소의 관계자는 “출연연구소별로 한 해 예산의 10%를 떼어 5000억원 정도의 재원을 만들어 공동 프로젝트에 나서자”고 제안했다. 민·군 협력을 활성화하려면 예산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비국방분야 연구소라도 돈을 갹출할 용의가 있다는 제안이다. 현장에 있던 민간 전문가들도 이 같은 얘기에 적극 공감했다는 전언이다.

지난해 국방 R&D 예산 2조원 중 민간이 주관 기관으로 참여한 사업 예산은 172억원. 전체의 1% 미만에 그쳤다. 군은 민간의 참여가 저조하다고 말하지만 민간은 군에서 뭘 필요로 하고, 뭘 하려 하는지 몰라 참여 기회조차 없다고 불만을 내놓는다. 민·군 사이에 쌓인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방사청이 국방 R&D를 너무 무기개발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민간과의 협력이 더디다고 보고 있다. 무기 외에 사이버 보안이나 전자장치 등 민간이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분야들로 국방 R&D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한 참석자는 “기획 단계부터 민간이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과감하게 개방하지 않는다면 민간과의 R&D협력은 요원한 얘기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김태훈 중기과학부 기자 taehun@hankyung.com